마루 끝 일기

10화 수박 열 개와 시골 인심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마루 끝 일기 10화

수박 열 개와 시골 인심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오늘은 괴산 밭으로 향하는 날.
일주일 만에 다시 찾은 수박밭은 잎들이 시들시들,
마치 목을 길게 빼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얼른 수도꼭지를 틀고 호스를 끌었다.
길게 이어진 고무호스를 잡고
밭 한 귀퉁이까지 올라가 물을 골고루 뿌렸다.
마른입들이 물을 삼키는 소리가
이 더운 여름날, 유일한 음악처럼 들린다.

태양이 점점 머리 위로 치닫고
내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릴 때
임시로 세워둔 그늘막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얼음물로 가득 채워왔던 아이스박스의 물도
벌써 미지근해졌다.

잠시 쉬며 수박 하나를 씻어 반으로 갈랐는데
빨갛고 단단한 속살이
그간의 땀과 애쓰음을 한순간에 보상해 주는 듯했다.
갓 딴 수박은 차갑진 않아도
싱싱하고 달달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여름.
그걸 베어 물며 아랫마을을 바라보니
천하가 내 앞에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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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열 통을 깨끗이 골라
차에 싣고 동네 작은 슈퍼로 향했다.
텃밭 바로 옆집이자 오라버님이 운영하시는 곳.

"오라버님, 이거 좀 놓고 팔아주세요.
언제나처럼 입금은 알아서 부탁드릴게요."

정식으로 거래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값을 정해두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눔에 가까운 부탁이고
그 역시 선뜻 받아주신다.

모종을 살 때 그랬다.
"많이 열리면 좀 가져와요. 팔아줄게요."
그 한마디가
시골살이의 인심이자 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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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버님 댁은
버섯도, 커피도,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도
언제든 건넬 수 있는 곳이다.
밭일하다 힘들 때면
"들렀다 가요." 하시던 그 말,
정말 쉬었다 가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수확한 고구마, 토마토, 참외를
한 보따리 챙겨가면
그쪽도 또 뭔가 손에 들려 보내신다.
사는 게 이런 것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교환.
사랑, 정, 수고로움, 인정, 그리고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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