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디터 람스(Dieter Rams)의 디자인 10 계명은 디자이너들의 바이블입니다.
좋은 디자인은 기능과 심미성, 정직함과 지속성을 갖춰야 합니다. 여기서 ‘정직함’이란 단순히 '속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품이 가진 ‘의도’와 ‘본질’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 의도란,
제품을 보면 ‘아, 이거 이렇게 쓰는 거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보이는 형태가 곧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다는 의미는 '윤리적 정직함’ 뿐만 아니라 형태와 기능의 '일치’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직관적이며 단순함을 원하지만 늘 복잡함에 끌립니다. 복잡한 것이 ‘고차원적’이라는 착각이 마음속에 있습니다.
저도 자신이 없을 때 복잡해집니다.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이것저것 갖다 붙입니다. 만족시키지 못한 무언가를 해결하는 대신 이것저것 더해서 고차원인척을 하는 거죠. 그러다가 가끔 사차원이 되기도 합니다.
의도를 뚜렷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보인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만든 가구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전 글 [반려가구]에서 썼듯, 저는 방을 테마로 책상, 침대, 그리고 책장을 만들었습니다.
책상은 1인 책상입니다. 혼자 사용하기 적합한 크기입니다. 다리가 책상 안쪽으로 살짝 들어와 있어서 의자를 나란히 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사용하는 책상입니다. 특별한 기능은 없습니다.
침대도 1인용입니다.
매트리스와 베개를 올리면, 침대 헤드 높이와 비슷해져서 데이베드 같은 느낌이 납니다.
2단 책장을 만들었습니다.
책은 세워서 꽂습니다. 눕혀서 놓을 수도 있지만 저는 세워서 꽂는 형태로 디자인했습니다. 칸마다 높이를 달리해 큰 그림책부터 작은 책까지 수납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구는 형제자매처럼 닮았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참나무, 그리고 굵직한 두께.
곧은결 무늬(쿼터 손, Quarter Sawn)의 나무를 썼습니다.
이 세 가구를 만들 땐 디터람스의 ‘좋은 디자인’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최근엔 작은 소파 테이블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전에 만들었던 테이블 세 개는 모두 버렸는데, 이 테이블을 아마 오랫동안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이 테이블을 만들 때 간이책장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는 독서교육을 강조합니다. 집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 늘 10~20권씩 있는데, 이 책들을 둘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한 번에 모아둘 수 있는 책장이 필요해서 만들었습니다. 책을 막 쌓아놓기에 딱입니다. 다만, 이 책장은 처음 봤을 때 용도를 알기가 힘듭니다. 만든 의도를 한번 설명해야 하기에 조금 아쉽습니다.
이번 가구들이 이전에 만든 가구보다 훨씬 잘 만들어진 건 아닙니다.
[내가 버린 가구]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버린 가구들은 용도가 뭔지 알 수 없는 가구들이었습니다.
우리 집에 어울리지 않았고 가족들의 생활방식과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예쁜 것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런 가구를 만들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땐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만들고 싶은지 몰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구의 형태와 기능이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의도가 드러나지 않았죠.
MBA, 경영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GMAT 시험 성적을 제출해야 합니다.
이 시험은 지원자의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분석적 추론(Analytical Reasoning), 언어·수리적 문제 해결 능력을 측정해 비즈니스 환경에서 필요한 의사결정 능력과 문제 해결력을 측정합니다.
GMAT 시험과목 중 SC(Sentence Correction)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가장 ‘문법적으로 정확하고, 의도가 명확하며, 표현이 간결한 문장을 고르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KTX를 타고 부산에 갔다'라는 문장이 가장 좋은 표현이라면 보기에는 모호한 문장 5가지를 보여줍니다.
1. 나는 KTX를 타고 부산에 갔다.
2. 부산으로 감에 있는 KTX를 탔다
3. 나는 빠른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갔다
4. 나는 KTX에 태워져 부산에 갔다.
5. 부산에 간 것은 KTX를 탔기 때문이다.
보기 중 가장 좋은 문장, 1번이 답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과목을 공부하다 보면 문장을 어떻게 표현해야 가장 모호하며 이중적인 의미를 줄 수 있는지도 알게 됩니다. 나에게 유리상황일 때는 최대한 명확히 이야기하고 불리한 입장일 때는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는 것이죠. 의도를 숨깁니다.
사람들은 의도를 숨기는 데 익숙합니다. 때론 그게 미덕으로 여겨집니다.
잘났어도 못난 척하는 겸손, 못났어도 잘난 척하는 용기, 좀 부족한 듯 보여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를 늦추게 하는 것.
어찌 됐든 의도를 숨기다 보면 나 자신의 선호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을 놓칠 때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일주일 중 무슨 요일을 제일 좋아해?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니?
지금 나에게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질문을 하는 상대방의 의도를 재는 습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평소 잘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질문에 답하기 어렵습니다.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가구를 만들 때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명장처럼 잘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신감'이었습니다.
디자인은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비스니스에도 의도를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의도를 숨기고 사는 것이 익숙합니다만 때로는 의도를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구를 만들려고 노력할 때,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계속 생각을 합니다.
내 생각, 솔직한 마음, 의도를 드러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의도를 드러내도 믿지 않을 복잡한 세상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