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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경계에 선 사람

by 경계 Liminal

나는 무언가가 되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아직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일 뿐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어떤 그룹에도 완전히 포함되지 못했다. 눈에 띄게 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동화되거나 편안하지도 않았다. 늘 어딘가 약간 비켜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모서리에 기대어 대화를 듣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자라며 배운 것은 ‘적당한 거리 두기’였다. 너무 멀어지면 고립되고, 너무 가까워지면 사라진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사람들은 ‘소속’을 통해 존재한다. 학교라는 제도, 회사라는 조직, 혹은 친구라는 관계. 그 어딘가에 확실히 발을 딛고 있을 때, 존재는 의심받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잠시 들른 사람처럼 머물렀다. 발을 붙이는 대신, 그림자를 남겼다. 존재를 증명하기엔 너무 흐릿했고, 완전히 떠나기엔 너무 또렷했다.


제도란 편리하다. 누군가가 그려놓은 지도 위에서 자신의 좌표를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직장, 자격증, 연봉, 결혼, 내 집 마련… 모든 단계는 예측 가능하고, 주변의 시선과 기대는 명확하다. 나는 그 지도를 따라가려 했다. 최소한 그 길에 올라야만 나도 ‘존재’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길 위에서 나는 점점 더 흐릿해졌다. 다른 누구의 인생에는 길이었을 그 좌표들이 나에게는 울타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회적 정의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는 것과, 나로 존재하는 것은 같지 않았다. 때로는 충돌했고, 더 자주 무기력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더 안쪽이 아닌 바깥을 보기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나는 질문을 바꾸었다. ‘무엇이 될 것인가’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로. 그 질문은 간단하지 않았고, 대답은 아직도 유예된 상태다. 하지만 그 질문을 붙잡고 있는 동안만큼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글은 그 붙잡고 있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말로써는 정의되지 않는 존재라도, 쓰는 동안만큼은 분명히 있다. 경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미완의 상태이며, 동시에 관찰의 특권이다. 안과 밖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서 나는, 나를 다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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