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르다’는 말은 너무 이른 시점에 나에게 찾아왔다. 그 시점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나를 판단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단지 외부의 정지일 뿐이었고, 내가 말할 수 없었던 고통의 내막은 ‘게으르다’라는 단어로는 결코 설명되지 않았다. ‘게으르다’는 말은 단지 게으르지 않은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강자의 언어였다.
억울하다는 감정조차, 당시에는 이름 붙이기 어려웠다. 해명은 없었고, 해명할 수 있는 언어조차 없었다. 내 안에서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은 표현되지 못한 채 체내에 갇혀 있었고, 감정은 침묵 속에서 무력하게 썩어갔다. 반응할 수 없다는 것은 항변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항변하지 못했다는 것은 곡해된 채로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나를 감싸고 있는 언어의 구조를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그것에 의해 포획당해 있었다.
실패는 반복되었고, 그것은 결국 나에게 고유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었다. 타인의 기대에 도달하지 못하는 패턴이 쌓이자, 주변도 나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여겼고, 나중에는 낙오라고 불렀으며, 마지막에는 ‘그럴 줄 알았어’라는 말로 끝났다. 반복되는 실패는 결국 정체성이 되었고, 정체성이 된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구조였다. 그것은 단지 반복된 우연이 아니라, 작동하지 않는 구조였다. 나는 그 사실을 아주 늦게야 깨달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해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내게는 그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의지’는 실행의 전제가 갖춰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어였고, 나에게는 전제 없이 오직 의지만이 반복적으로 요구되었다. 충분한 에너지, 적절한 환경, 감정적 납득, 자극 안정성, 자기 확신 같은 것들이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의지는 작동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겼고, 나는 그 당연함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끝없이 고장 났다.
무엇이든 시작하려면, 나에겐 먼저 납득이 필요했다. 내가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 것인지, 감정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나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납득은 사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작동 조건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해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나에겐 그것이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고, 납득되지 않는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은 두려움이었으며, 나를 파괴하는 일이었다.
내 신경 구조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감각 자극에 쉽게 지쳤고, 몰입을 유지하는 시간이 짧았으며, 정서적 피로는 언제나 더 빨리 찾아왔다. 감각은 과잉되어 있었고, 사고는 비정상적으로 복잡했고, 무엇보다 루틴이 없으면 모든 기능이 멈췄다.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고, 게으름이나 무책임 같은 도덕의 언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지 내 존재가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그 말은 나를 판단할 수는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게으르다’는 말은 나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것은 나를 지적할 수는 있었지만, 해석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단어를 견딜 수 없었지만, 그것을 바꿀 언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말해지지 않은 존재가 되었고, 말해지지 않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오해된다.
ADHD라는 이름은 마치 사후 진단처럼, 한참 뒤에야 등장했다. 진단은 있었지만, 해석은 여전히 없었다. 내 고통은 진단보다 먼저 있었고, 그 고통은 오랜 시간 설명되지 않은 채 축적되었다. INTP라는 성향 언어는 어떤 해석의 틀을 제공했지만, 실행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무력했다. 나는 깊이 생각할 수 있었고, 수많은 가능성을 그려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행할 수는 없었다. 사고는 언제나 활발했지만, 그 사고를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도 충족되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멈춰 있었던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다. “왜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은 늘 나를 비난했고, 나조차도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 질문이 틀렸다는 것을, 나는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에게 필요한 질문은 “왜 할 수 없었는가?”였고, 그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게으르지 않았다. 나는 단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 구조의 문제였고, 환경의 조건이었으며, 감각과 정서, 인지와 실행이 서로 충돌하는 구조적 불일치였다. 그것은 어떤 나약함도 아니었고, 어떤 선택의 결과도 아니었다.
말해지지 않는 존재는 항상 오해된다. 그리고 오해된 존재는 자기혐오에 빠지고, 자기혐오는 침묵으로 이어진다. 나는 침묵하지 않기 위해, 이 말들을 선택했다. 이 말들로도 나는 아직 충분히 복원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를 해석할 수 있는 더 깊은 구조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조는, ‘실패’라는 단어에서 출발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