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ADHD를 진단받았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오랫동안 이유 없이 무너져 있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의력 결핍’이라는 이름은 내 실패와 좌절, 무기력까지도 대신 정리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이름에 기대었고, 한동안 그것으로 나를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가 점점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익숙한 문장을 누가 다른 말로 바꿔놓은 것 같은 어색함. 얼핏 그럴듯했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나는 주의가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의할 것이 너무 많았다. 내 안의 감각은 항상 과잉 상태였고, 자극은 너무 쉽게 나를 통과했다. 세상의 소음은 내게 더 크게 들렸고, 빛은 더 강하게 다가왔다. 대화 중 상대의 억양 하나, 문장 구조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고, 그러는 사이 나는 매번 본질에서 멀어졌다. ‘산만하다’는 표현은 내 상태를 설명하기엔 너무 얕은 말이었다. 나는 ‘주의가 산만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자극을 동시에 수용해 버리는 사람’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몰입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서적 안정, 공간의 조도, 소리의 빈도, 주변 사람의 말투, 나 자신의 피로도까지. 그 모든 조건이 동시에 갖추어졌을 때에만 나는 몰입할 수 있었고, 그것들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게으르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몰입을 잃은 존재였다. 정확히 말하면, 몰입할 수 있는 ‘조건’을 갖지 못한 존재였다. 몰입은 재능이 아니라 구조였다. 그리고 나는, 그 구조를 가질 수 없었다.
사람들은 ADHD를 충동성과 즉흥성으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너무 많이 멈춰 있었다. 생각은 많았고, 계획도 많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머릿속은 생각으로 넘쳐났고, 몸은 정지해 있었다. 실천이 없는 사유, 동력이 없는 사고, 시작이 없는 의지. 나를 구성한 것은 바로 그것들이었다. 나는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과잉된 사유와 무너진 실행 조건 사이에 붙들린 존재였다.
그리고 그 실행 조건의 핵심에는 루틴이 있었다. 어떤 일이든 내가 반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려면, 루틴이라는 일종의 ‘작동 알고리즘’이 필요했다. 이 루틴은 선택이 아니었다. 습관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었다. 루틴이 무너지면 시스템 전체가 꺼졌고, 그 안에서 나는 기능을 상실했다. 루틴은 나에게 질서나 성취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유지 장치였다. 내가 일관된 환경과 흐름을 중시하는 이유는, 단지 계획을 잘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라는 시스템이 부팅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자책했다. 왜 이렇게까지 복잡할까. 왜 나만 이토록 까다롭고, 유난스럽고, 예민해야 할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이 단순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의지가 약한 것이 아니라, 뇌가 다르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뇌는 감각의 범람에 항상 침수되어 있었고, 그것을 견디는 데에만도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다. 신경적 조건은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조건 속에서, 가능한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 고통은 진단보다 먼저 있었다. 진단은 내게 구원이자 한계였다. 그것은 나를 설명해 주는 듯했지만, 동시에 그 고통이 얼마나 오래되고, 얼마나 구조적인지를 가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진단이 없던 시절에도 나는 존재했고, 이미 고통받고 있었다. 진단은 존재에 뒤따라 붙은 해석이었을 뿐이다. 진단이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진단은 나를 온전히 납득시키지 못했다. ‘주의력 결핍’이라는 단어는 너무 간단했다. 그 말 안에는 나의 복잡함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내 안의 과잉, 사유의 잉여, 실행 조건의 무너짐. 그 어떤 것도 이 단어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언어였지만, 하나의 세계는 아니었다.
나는 ‘결핍’이라는 언어를 해체해야만 했다. 그것은 나를 억누르던 낙인의 말이었고, 동시에 나를 오해하게 만든 프레임이었다. 그 단어는 언제나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식으로 나를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덜 가진 사람이 아니라, 너무 많이 가진 채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게 ADHD는,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었다. 감각의 과잉, 사유의 과잉, 그리고 실행 불능의 조건. 그 모든 것이 합쳐져야만 나의 구조가 설명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설명은, 진단에서 오지 않았다. 어떤 진단이 나를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진단은 계기였을 뿐이다. 해석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나를 살아낸 사람이고, 사유한 사람이고, 끝까지 납득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진단이 아닌 언어를 갖고 싶다. 나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 나로부터 만들어낸 구조의 말. 그리고 그 언어는, 다음 장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