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한 사람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았고, 유지하지 않았고, 완성하지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실패라 불렀고,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실패자라는 말은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나는 결과를 내지 못했으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든, 어떤 의도를 품었든, 세상은 ‘실행된 것’만을 결과로 삼았다. 그리고 실행되지 않은 모든 것은 실패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내가 실패한 걸까, 아니면 실패라는 말이 처음부터 나를 잘못 가리키고 있었던 걸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정말로 ‘실패한 사람’이기나 한가. 나는 그 질문에 확신할 수 없었다. 결과만으로 과정을 해석할 수는 없다. 실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실패자가 되어야 하는가. 나는 충분히 시도하지 않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애초에 실행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었을까.
실패라는 말은 언제나 ‘가능했으나 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품고 있다. 할 수 있었는데 안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난이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겪은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나는 도무지 어떤 것도 실행할 수 없었다. 계획은 있었지만 실행은 없었다. 욕망은 있었지만 작동은 없었다. 그것은 태만이 아니라 불능에 가까웠고, 게으름이 아니라 구조적 실행 결여였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않느냐”라고.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긍이 곧 실행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맞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수긍하는 것과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나는 납득되지 않은 과업 앞에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떤 일이라도 그 맥락이 이해되지 않으면 나는 그저 멈춰버렸고, 그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서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납득하지 않으면, 내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해의 문제는 아니었다. 정서적 연결이 끊어지면, 나의 작동도 멈췄다.
이것은 단순히 성격이나 기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가진 신경 구조는 루틴이 없으면 방향을 잃고, 자극이 지나치면 기능이 멈췄다. 루틴과 안정성, 조용한 환경과 반복 가능한 흐름은 내게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었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나는 실행 이전의 상태에서 무한히 맴돌았다. 해야 할 일을 알면서도 하지 못했고,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하면서도 손을 대지 못했다. 나는 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행 불능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파편화된 무기력으로 퍼졌다. 할 일을 미루다가 스트레스를 받고, 미룬 자신을 자책하다가 자기혐오에 빠지고, 그 혐오가 에너지를 갉아먹으며 다시 실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악순환이 굳어지고, 그 굳어진 상태가 나의 기본값이 되었다. 문제는 그 상태가 너무 오래 이어져서, 이제는 누구도 그 원인을 묻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으로 받아들여졌고, 나도 나를 그런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실패’라는 말은 그 모든 맥락을 삭제한다. 단 두 음절로 나의 조건을 덮어버린다. 그 속에는 어떤 사유도, 감정도, 뇌의 회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결과만이 있고, 결과에 도달하지 못한 자를 향한 판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실패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패는 최소한 시도라도 해본 사람에게 허용되는 단어 아닌가. 나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날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날들은 도전이 아니라 정지였고, 거부가 아니라 작동 불능이었다.
나는 생각할 수는 있었다. 어렴풋이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감각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장면은 너무 복잡하고, 과정을 예측하려 하면 오히려 더 피로해졌으며,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뇌는 모든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다가 멈춰버렸다. 결국 나는 사유만을 반복하며, 그 사유의 무게에 짓눌려 어떤 실행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흘려보냈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나의 자아는 작아지고, 존재는 흔들리고,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제 나는 말하고 싶다. 실패라는 단어는 결코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실패가 아니라, 실행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그것은 단지 내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노력이라는 것의 전제가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는 단지 의지를 내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의지를 낼 수 있으려면, 너무 많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회는 그 조건들을 이해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그 조건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그 조건을 알게 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여전히 불완전하고, 많은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제는 내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채 실행을 요구받은 사람이었다.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의지를 가져도 실행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행되지 않는 삶을, 실패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실패할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실행 불가능을 실패로 치환하는 이 사회의 언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오류였다.
그 오류를 해석하고, 저항하고, 다시 쓰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과제다.
언어를 되찾는 것만이, 내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