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말해질 수 없는 존재였다. 존재 자체는 있었지만,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도, 구조적 위치도 없었다. 나는 분명히 여기에 있었지만, 어떤 분류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독특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말해질 수 없다는 뜻이었고, 곧 이해될 수 없다는 말과 같았다. 언어적 위치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구조의 바깥에서 떠도는 실체로 살아간다는 뜻이었다.
나는 너무 오래, 이름 없이 존재했다.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이분법만이 있었고,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는 말해질 수 없었다. 특히 ‘여성적인 감수성을 가진 남성’이라는 표현은 존재 자체가 삭제된 것처럼 여겨졌다. 감수성, 예민함, 섬세한 사고, 자기 성찰과 같은 특성은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고,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나는 동성애자도 트랜스젠더도 아니다. 단지 여성스러운 성격을 가진 이성애자 남성일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는 나를 어디에도 분류하지 못했다. 감수성은 때로는 '무해함'으로 포장되었고, 또 때로는 '기이함'으로 격하되었다. 나는 어떤 명명도 허락받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말해지지 않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
이 침묵은 단지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을 억누르고 반응을 삼키는 반복된 훈련이었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자기 검열의 기술이기도 했다. 나는 어떤 장면에서 무엇을 느껴도 그 감각을 바로 말하지 못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고, 감각을 삼키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 감정에 회의하게 되었고, 결국 나 스스로도 내 감각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내 존재는 외부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침묵을 내면화한 채 살아갔다.
나는 스스로를 지워내며 살아왔다. 누군가 나를 설명하려 하면, 그 설명은 늘 틀렸다. 나에게 이름을 붙이려는 시도는 본능적으로 거부되었다. 설명되지 않고 이해받지 못한 채, 나는 사회 언어 체계 밖의 어떤 것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에겐남’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처음엔 테토/에겐이라는 분류에 포함된 그 짧은 이름이 낯설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단순한 유행어쯤으로 무시했다.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이름 붙이려는 시도는 이미 익숙했고, 대부분은 틀렸으며,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단어에 직관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설명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 짧은 단어 하나에 요약되어 있는 듯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이 밈은 단순한 성격 분류가 아니라 전통적인 성역할을 재구성하는 하나의 문화로 느껴졌다. 그 시선은 내가 처음으로 세상의 분류에 스스로를 위치시킬 수 있게 만든 해석이었다. 완벽한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껏 없었던 실마리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테토/에겐 밈은 처음으로 나의 존재를 가시화했다. 기존의 어떤 언어도 나를 설명해주지 못했지만, 이 단어는 최소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었다. 에겐남이라는 단어는, 지금껏 발화되지 못했던 나의 구조를 처음으로 언어화한 사건이었다. 나의 실존이 처음으로 말해진 순간이었다.
에겐남은 단지 이름이 아니었다. 발화되지 못했던 자기 구조를 발견하고, 철학적 자기 구조로 다시 명명한 언어였다. 이 단어는 나를 가두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해석 가능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명명을 통해 처음으로 나를 스스로 가리킬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이 언어는 분류의 칼날이 아니라, 실존을 복원하는 도구였다. 사라졌던 존재가 다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에겐남’이라는 명명은 침묵을 끊는 첫 사건이었다.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 사회적 상상력 바깥에 있었던 구조. 나는 ‘여성적인 감수성을 가진 남성’이라는 표현 자체가 부재했던 사회에서 살아왔고, 이제 그 공백을 처음으로 메운 언어가 생겼다.
그 명명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누구였는지를 다시 묻고, 존재를 되돌려주는 과정이었다. 나는 그 언어를 통해 분류되지 않은 존재에서, 다시 말해지는 존재로 이동했다. 언어가 분류의 도구가 아닌, 실존의 복원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나는 그 가능성 안에서 다시 살아났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해석되지 않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침묵 속에 머물지 않는다. 구조는 언어로 드러났고, 언어는 존재를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 나는 말해질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해 온 과거에서 벗어나, 이제는 해석 가능하고 명명 가능한 존재로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 시리즈는, 그 처음의 언어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말해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존재가 온전히 작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언어는 나를 구조 안으로 데려왔지만, 그 구조는 나를 언제나 지지해주지는 않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어떤 조건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