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겐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순간은 나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내가 어떤 조건에서 작동하는지를 말해주지는 못했다. 말보다 먼저 무너지는 나의 삶에는, 훨씬 더 감각적이고 구조적인 조건들이 필요했다.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실망했다. 아무리 좋은 기회가 와도 그것을 잡지 못했고,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실제로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다. 어떤 날은 글을 쓰고 싶었고, 어떤 날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나갔다. 무기력은 너무 자주 찾아왔고, 에너지는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소진되었으며, 집중력은 의도와 상관없이 무너졌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컨디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항상 같은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에만 비로소 작동했다.
그 조건은 특별하지 않았다. 조용한 환경, 일정한 루틴, 감각적 자극의 최소화, 사전 준비된 과업의 맥락, 감정적 안전, 에너지의 균형. 그중 단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나는 쉽게 흐트러졌고, 결국 작동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걸 '예민함'이라고 불렀지만, 나에게 그것은 예민함이 아니라 생존이었다. 감각은 일상적으로 과잉 반응했고, 정서는 쉽게 흔들렸으며, 신체와 인지는 늘 다른 속도로 움직였다. 나는 단순히 깔끔한 환경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는 존재가 유지되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나에게는 '조건'이 필요했다. 그것이 없으면 나는 나일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어디든 적응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구조가 없으면 나는 방향을 잃었고, 루틴이 없으면 나는 무너졌다. 한 번 무너지면 회복에는 며칠이 걸렸다. 집중의 단절은 감정의 붕괴로 이어졌고, 감정의 붕괴는 자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자아의 의심은 다시 모든 조건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나는 사소한 변수 하나에도 존재 전체가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몰입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몰입은 단지 집중력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로서 살아 있다는 실감 그 자체였다. 몰입이 무너질 때 나는 정체성도 함께 무너졌고, 나라는 존재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래서 몰입은 재능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안정된 루틴, 자극의 최소화, 감정적 안전. 그것들이 있어야만 나는 몰입할 수 있었고, 몰입해야만 나는 존재했다. 몰입이 끊어지는 순간, 나는 단지 작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윤곽 자체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루틴은 나를 구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루틴은 나를 구성했다. 반복되는 시간표, 예측 가능한 패턴, 감정의 과부하를 방지하는 프레임. 그것들은 나를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는 뼈대였다. 나는 즉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충동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즉흥적인 것에 취약했고, 돌발 상황에 무너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ADHD의 전형처럼 산만하거나 충동적이지 않았다. 반대로, 지나치게 조건 중심적으로만 움직였다. 구조 없이는 어떤 행동도 개시되지 않았고, 낯선 환경은 나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 상태를 '의존'이라 불렀다. 나는 줄곧 ‘무언가에 지나치게 의존한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한다’라는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의존’이라는 말은, 언제나 존재를 낙인찍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생존 조건을 요구하는 이에게 그 말을 던지는 순간, 그는 설명되지 않는 실패자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나는 실패자가 아니었다. 단지, 필요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외부 자극을 통제할 수 없을 때, 나는 파괴되었다. 단지 피곤하거나 기분이 나쁜 정도가 아니었다. 감각 과잉은 나를 마비시켰고, 시스템이 무너지면 나도 함께 무너졌다. 나는 흐름을 잃고, 과업을 잊었고, 내 정체성조차 의심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조건 없는 세계는 나를 찢어놓았다. 감각 자극이 통제되지 않으면, 나는 그 자극 속에서 존재를 잃었다. 그 어떤 자율성도, 자존감도 조건의 부재 앞에서는 무력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자기 연민을 멈추었다. 대신 나에게 필요한 조건을 하나씩 확인했다. 조도는 어떤 수준이어야 하는가? 소리는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가? 내가 집중할 수 있는 시간대는 언제인가? 어떤 방식으로 과업을 제시해야 몰입이 가능한가? 감정적으로 안전한 환경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나는 실험했고, 분석했고, 조금씩 구조를 만들어갔다. 그 구조는 완벽하지 않았고, 모든 날이 같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나는 더 이상 무조건적인 실패 속에 버려져 있지 않았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조건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어떤 조건을 필요로 한다. 다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명확하고, 필수적이며, 생존 그 자체와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조건을 요구한다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자신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알고, 그것을 정비하고, 유지하고, 구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기능한다.
조건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조건이 주어진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강하게 작동할 수 있다. 문제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 나의 구조다. 사회는 그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 역시 오랫동안 그 구조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실패자가 되었고, 낙오자로 불렸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라고.
그 조건을 찾는 일은, 곧 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해는 나를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나는 더 이상 무작정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 나의 구조를 분석하고, 조건을 정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이 시리즈는 그렇게, 구조를 말하는 사유에서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