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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정의한 것은 진단이 아니라 사유였다

by 경계 Liminal

나는 한때 진단을 원했다. 진단은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줄 거라 믿었다. 실제로 ADHD라는 말은 나의 실행 불능 상태, 무기력과 충동, 감각 과잉과 몰입 실패를 어느 정도는 설명해 주었다. 진단은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일 뿐이라는 위안을 주었다. 나는 실패자가 아니라, 이해받지 못한 존재라는 말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진단 안에서도 다시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단은 일종의 기표였다. 어떤 고통을 의미화해 주는 동시에, 그 고통을 다시 고정된 형식으로 붙잡아 두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은 진단명을 듣는 순간, 그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진단은 이해를 가능하게 만드는 동시에, 오해를 고착시키는 구조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내가 ADHD 진단을 받았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사람들은 나를 산만하거나 충동적인 사람으로 오해했고, 나는 그 오해를 해명할 수 없었다.


ADHD는 나의 일부를 설명해 주었지만, 전부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감각 과잉이나 실행 불능 같은 특정 증상을 구조화했을 뿐, 나라는 존재 전체를 해석해주지는 못했다. 내가 감각에 무너졌던 날들의 정서, 몰입이 끊겼을 때의 실존적 침몰, 어떤 언어로도 포착되지 않던 고통의 리듬이 있었다. 그것들은 진단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묻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내가 붙잡은 것은 사유였다. 사유는 아무도 대신 써주지 않는 나만의 문장으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진단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언어였다면, 사유는 내부에서부터 떠오른 언어였다. 진단은 나를 통계적으로 배열했지만, 사유는 나를 고유하게 구성했다. 사유는 내 존재를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그 시도 자체가 나를 존재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유를 통해 나의 조건을 정리했고, 반복되는 실패의 패턴을 해석했으며, 감각과 감정의 관계를 추적했다. 왜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무너지는가? 왜 어떤 조건에서는 몰입하고, 어떤 조건에서는 마비되는가? 나는 질문했고, 관찰했고, 해석했다. 그 사유는 단지 의미를 부여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반복되는 실패에 무너지지 않기 위한 패턴을 인식하고, 감각적 과부하를 피하기 위한 방식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그 모든 생존의 조건들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해석했고, 해석하기 위해 사유했다.


그 과정은 진단보다 더 오래 걸렸고, 더 아팠으며, 더 고독했다. 사유는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 길이었고, 정답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하게 나를 정의할 수 있는 길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왜 무너졌고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단이 아니라 사유가 필요했다. 나는 나를 해석해야 했다. 아무도 나를 대신 설명해주지 않았기에.


사유는 나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다. 실패했을 때, 무너졌을 때, 이해받지 못했을 때조차도, 나는 스스로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사유는 나를 고립에서 건져냈고, 나의 실패를 다시 구성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스스로를 해석하는 말들, 의미를 붙잡는 방식, 질문의 리듬을 나에게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단지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살아남는 기술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진단이나 유형을 통해 자신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설명이 전부라고 여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늘 그 언어 바깥에 있었고, 늘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썼다. 나를 납작하게 만드는 기존의 언어들을 버리고, 나만의 문장을 만들었다. 그 문장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찾아갔다.


나는 진단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유형으로도 정의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나의 사유만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조차, 나는 여전히 사유하고 있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내가 나를 정의해 나가는 방식이다.


결국, 나를 정의한 것은 진단이 아니었다. 유형도 아니었다.

나를 정의한 것은, 언제나 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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