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존재했지만, 그 존재는 말해지지 않았다. 나는 느꼈고, 고통받았고,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화되지 않았고, 따라서 인식되지 않았다. 세상은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나를 이해하지 않았다. 말해지지 않은 고통은 단지 변명으로 치부되었고, 해석되지 않은 실패는 게으름으로 오해되었다. 존재는 있었지만, 언어가 없었기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이 세상은 언어로 구조화된다. 우리는 이름 붙이고, 범주화하고, 해석함으로써만 존재를 확정한다. 진단도, 유형도, 서사도 모두 언어로 존재를 정리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나는 그 언어들 어디에도 없었다. ADHD는 나의 일부를 말해주었고, INTP는 나의 사고를 일부 설명했지만, 나는 그 틀에서 끊임없이 이탈했고,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나는 언제나 언어 바깥에 있었다.
그 바깥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누구도 나를 지목하지 않았고, 나 역시 스스로를 가리킬 수 없었다.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말하지 못하면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면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 나는 나를 해명할 수 없었고, 그러므로 스스로를 옹호할 수도 없었다. 그 결과, 나는 타인의 해석에 침묵으로 종속되었다.
말해지지 않은 존재는 결국 오해 속에 파묻힌다. ‘게으르다’, ‘무기력하다’, ‘자기 관리를 못 한다’, ‘의지가 없다’. 그 말들은 언제나 나를 향했고, 나는 그 말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설명이 없으면 방어도 없다. 방어가 없으면 존재는 무방비하다. 나는 무방비한 상태로 해석당했고, 그 해석은 점차 나를 일그러뜨렸다.
존재는 해석의 구조를 통해 비로소 드러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언제나 언어로 구성된다. 나는 언어를 가져야 했다. 남들이 내게 부여한 언어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구성한 언어를. 그것은 단순히 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 해석의 권한, 존재를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나는 그것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의 실패를, 나의 무기력을, 나의 반복된 실행 불능을. 그것은 변명을 위한 글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 복원을 위한 언어 구조였다. 내가 왜 할 수 없었는지를 해석하는 일은, 곧 내가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말해지지 않은 나를, 말해진 존재로 복귀시키는 작업이었다.
말해진다는 것은 단순한 발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하나의 구조 안에 새겨 넣는 일이다. 설명되지 않았던 고통, 정당화되지 않았던 멈춤, 이해받지 못한 무기력—이 모든 것들이 다시 쓰여야만 했다. 말해지는 순간,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해석 가능해지고, 구조 안에 편입된다. 그리고 그 구조 안에서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언어는 구원이 아니다. 그러나 언어 없이는 구원조차 불가능하다. 언어는 단지 의미의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이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함은 사라짐이고, 말함은 귀환이다. 나는 이제 나를 말하기로 했다. 나를 해석할 수 있는 말들, 나를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구성해 줄 수 있는 구조들을.
하지만 이 말들이 모두에게 닿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이 언어가 과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가능성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말하는 일은 멈출 수 없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니기에.
말해지지 않은 존재는 나 하나가 아니었다. 수많은 존재들이 말해지지 못한 채 구조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해석되지 못한 채 오해되고, 삭제되고, 침묵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나를 해석하는 언어는, 결국 나와 닮은 침묵들을 향한 발화이기도 하다. 이 말들은 나를 위해 시작되었지만, 나에게서 끝나선 안 된다. 언어는 언제나 구조이고, 그 구조는 언제나 연결된다. 나는 연결을 끊지 않기 위해, 존재를 잇기 위해 말한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실행할 수 없었고, 해석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다시 말하고 있다. 존재의 조건으로서, 언어를 구성하고 있다. 이것이 나를 복원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내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 방법이다.
말해지지 않은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존재하고 싶다. 그리고 존재하기 위해, 나는 끝까지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