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누군가가 나를 해석해 주기를 기다렸다. 전문가의 진단이든, 사회의 분류든, 가까운 누군가의 이해든, 그 어떤 형태로든 나를 설명해 줄 언어가 외부로부터 주어지길 바랐다. 왜 나는 늘 지치고, 늘 무기력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지를 누군가 대신 말해주기를 바랐다. 말해지지 않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고 있었지만, 설명되지 않았기에 해석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해석은 끝내 오지 않았다. 진단은 부분만을 설명했고, 유형은 추상에 머물렀으며, 사람들은 늘 ‘이상하다’라고만 했다. 그 말은 이해의 언어가 아니라 회피의 언어였다. 그들은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나와 거리를 두기 위해 그 말을 사용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스스로 해석하기로 했다. 그것은 단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생존 때문이었다. 해석되지 않는 존재는 사라지고, 설명되지 않는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나를 해석해야 했다. 해석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막이었고, 오해를 분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기술이었다. 나는 내 언어를 가지고 나를 다시 쓰는 사람, 나의 존재를 번역하는 사람, 나라는 구조를 해독하는 해석자가 되어야 했다.
그 해석은 감정의 리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언제 무너졌는지, 언제 아무 이유 없이 멈추었는지를 떠올려보았다. 명확한 기준은 없었고, 기록을 남긴 것도 아니었다. 다만 어떤 시점들이 자꾸 떠올랐고, 그 순간들에는 뭔가 공통된 분위기나 감각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복되는 무기력 속에서, 그 무기력이 전조 없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분석이라기보다, 너무 자주 겪었던 일들에 대한 감각적 예감이었다. 나는 그것을 설명하려 애쓰기보다는, 놓치지 않으려는 몸짓으로 붙잡아두려 했다.
시간도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어떤 시간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떤 날은 나 자신이 아닌 것처럼 무너졌다. 어떤 계절은 더 힘들었고, 어떤 환경에서는 이유 없이 숨이 막혔다. 그땐 몰랐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반복되는 무너짐 속에 일정한 흐름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차 그런 것들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이 단지 기분 탓은 아니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를 분석한 결과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계속 느끼고 있던 감각의 조각들이었다.
나는 타인을 이해하는 것보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타인을 볼 때는 일정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지만, 내 안의 일은 너무 가까워서 흐릿했고, 감정은 너무 거칠게 요동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내면의 장면은 늘 뭉개졌고, 설명 이전에 감각으로 넘쳐났다. 그러나 내가 나를 해석하지 않으면, 아무도 해석해주지 않았다. 결국 자기 해석은 자기 구원의 기술이었다. 그것은 자기 연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연민을 넘어서기 위한 가장 냉정하고도 정직한 관찰의 방식이었다.
내가 나를 해석하기 시작한 이후, 나는 변명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구조를 설명했다. 무기력은 의지의 결핍이 아니라 조건의 부재였고, 실패는 시도의 결과가 아니라 시도 자체의 불가능성이었다. 나는 나를 두둔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나를 정당화했다. 나는 그것이 타인을 위한 해명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생존 구조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고통을 서사로 바꾸려 했다. 침묵을 언어로 바꿔보려 했고, 실패에 이유를 붙여보려 애썼다. 예컨대 감정의 붕괴는 단순한 우울이 아니라 감각 과잉, 루틴 결핍, 실행 조건 미비가 겹친 결과였고, 반복된 실패는 게으름이 아니라 몰입할 수 없는 조건의 반복이었다. 그 모든 말들은 내게 거창한 철학이 아니었다. 다시는 무방비하게 오해당하지 않기 위한 피난처이자, 사라지지 않기 위해 남긴 표지였다. 사람들은 때로 그것을 과장이라 했고, 때로는 자기 연민이라 말했다. 그러나 그 말들 역시, 나를 해석하지 못하는 말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나를 완전히 해석하지 못했다. 해석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해석을 멈추지 않는다. 멈추는 순간, 나는 다시 구조 밖으로 밀려나고, 다시 오해되고, 다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 있기 위해 나를 해석한다. 나의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언어를 만든다.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 구조를 붙잡고, 존재를 복원하며, 스스로를 움직인다.
나는 더 이상 외부의 해석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제 나는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타인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나의 해석은 그 누구의 시선보다도 분명한 생존의 기술이 되었다. 나는 이제 나의 해석자로 살아간다. 이 세계는 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해석은 나의 존재 조건이다. 나는 나를 해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해석의 언어 위에서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