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과서적인 사람이었다.
소위 말하는 FM. 선생님, 엄마, 아빠 말 잘 듣는 모범생. 법 없이도 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특징. 1. 융통성이 없다. 2.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 3. 갈등상황을 극도로 싫어한다.
어린 나에게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교과서에는 착하게 살아야 된다고 쓰여있지만 실제론 착하면 바보라는 말을 듣는 세상이었고 정직해야 한다고 쓰여있지만 실제론 정직하면 손해 보는 세상이었고 남을 시기질투하면 안 된다고 쓰여있지만 실제 세상은 시기질투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내 기준으로는 교과서처럼 사는 게 맞는데 현실에서 그대로 살면 융통성 없고 꽉 막힌 사람, 답답한 사람, 바보 같은 사람이 되었다. 너무 어려웠다. 어떻게 살라는 건지. 나는 진정으로 착하진 못해서 착한 척하다 내가 손해 보는 상황이 생기면 너무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이기적으로 굴어버리면 그것 또한 마음이 불편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삶은 모순 투성이었다. 진짜 살아남는 법에 대한 길을 알려주는 곳은 없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어른이 되면 나의 이러한 혼란스러움도 사라지고 뭐든지 척척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이게 웬걸. 소위 말하는 어른이라는 반열에 올라가도 인생은, 인간관계는 어렵기 매 한 가지였다. 오히려 많은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 더 치이는 상황이 생겼다. 세상은 책과 달랐다. 힘든 상황이 생길수록 나는 숨었고 내 목소리를 죽였다. 모를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최고니깐.
그러다 피해 지지 않는 힘듦의 순간들이 찾아왔고 방법을 모르니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고 화남과 억울함이 쌓이니 어느순간 임계치에 도달했고 그 전과는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기 싫어지자 힘듦의 순간들을 직면했고 방법을 생각해냈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가 무식하게 치고받았다. 당장은 속이 시원했지만 내가 날을 세우면 세울수록 데칼코마니처럼 상대방도 똑같아졌고 긴장의 분위기가 늘 내 주변을 맴돌았다. 이게 답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작정 돌진했던 그때의 내가 너무 귀여운데 당하는 시기도, 복수하는 시기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시기도 겪다 보니 이제 조금은 유연해진 거 같다. 역시 경험이 최고다. 정답이 없으니 많이 부딪히고 겪어야 나만의 방식과 선이 생긴다.
성장하려면 아픔은 필수지만 아픈 시간만 끌어안고 자책하거나 남 탓만 한다면 삶은 괴로운 시간의 연속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걸 도태로 깨져도 보고 해결도 해보며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이 사람이지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람이니깐 나와 결이 맞는 사람을 찾으면 된다. 이걸 내가 겪어내서 배웠다는 사실이 글을 쓰고 읽는 지금 꽤나 뿌듯하다.
과거의 나는 남에게 의지도 하지 않고 의심도 많이 하고 ‘인생은 혼자다’를 마음속에 새기고 살았던 사람인데 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경험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사람을 통해 나는 치유받았고 성장했고 행복해졌다. 나의 감정을 나눌 사람이 지구에 단 한 명이라도 있어야 된다. 인생은 혼자가 아니다. 나를 울게 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나를 웃게 하는 것도 사람이다.
나와 결이 맞고 자기만의 중심이 있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은 그 자체로 나에게 선물이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깊어진 이해의 공간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게 되는 이 찰나의 순간 순간들로 나는 마음의 위안을,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모든 것에 감사함을, 삶의 행복을 얻는다.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들은 많다. 4월, 맛있는 음식, 예쁜 옷, 아름다운 작품, 분위기에 맞는 음악과 술, 내가 좋아하는 운동. 하지만 이런 것들은 행복을 줄 수 있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사람을 빼고는 진정한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결론은 뭐다? 사람 최고, 재밌는 거 최고, 노는 거 최고. 사람들과 더 열심히 놀면 된다.
일출 28분 전. 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