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화 Sep 30. 2024

21. 마음속 새소리

수현 (3)





남편은 제게서 눈길을 거두고 다 괜찮다는 듯 입꼬리를 양 옆으로 늘리더니 몸을 일으킵니다.


“밥 먹자. 당신 어제도 제대로 안 먹었잖아.”


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차릴 테니까, 당신은 좀 더 쉬고 있어. 준비되면 부를게.”


“고마워.”



저는 이제야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어 편히 앉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힐긋 봅니다. 냉장고를 열더니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저는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일순간 온몸이 소스라칩니다. 혹시 제가 지금까지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1년 동안 제가 아무 노력 없이 멈춰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입으로만 성은이를 보고 싶다, 찾고 싶다, 지겹도록 말하면서 실상은 제자리에서 무기력하게 지낸 것은 아닐까요. 아무 시도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성은이가 아니라 고작 나를 지키기 급급해서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남편은 1년 동안 쉰 적이 없었던 겁니다. 제가 쉬면 남편은 성은이를 곁에서 지켜야만 하니까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붙잡았던 성은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단지 제가 성은이를 위한답시고 이상한 걸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요. 들이치는 상념에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칼과 도마가 맞닿으며 규칙적인 소리가 들립니다. 남편이 무언가를 썰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집을 둘러봅니다. 조금 전까지 낯설게만 느껴졌던 거실이 다시금 익숙하고 편안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거실 중앙에 앉아 명상하는 남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는 고개를 돌려 괜히 남편의 옆얼굴을 몰래 살핍니다. 요리에 집중한 채로 근심 없는 표정입니다.



이제 남편은 진실로 괜찮은 걸까요. 제게 언질도 없이 홀로 명상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힘들까봐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남편은 그런 사람입니다. 말도 못하고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1년 동안 남편은 알게 모르게 제게 힘이 되어주었는데, 저는 힘이 되어주지 못한 듯합니다. 남편은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봐도 제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결혼 초반에는 우리가 서로를 보완하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았습니다. 남편이 제게 맞추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은이와 있을 때도 그랬습니다. 제가 보기에 남편은 좋은 아빠였습니다. 과연 저는 좋은 엄마였을까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싫습니다. 남편도 이런 제가 싫을까요. 남편은 언제까지 저를 기다려줄 수 있을까요. 남편은 홀로 고군분투했을 겁니다. 밖으로 나가 열심히 일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겁니다. 명상을 시작했을 겁니다.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저는……,


밖에서 새소리가 들립니다.



박연호 선생님의 인상이 스칩니다. 그를 딱 한 번 본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습니다. 과학자 같지 않은 외모에 예스러운 말투까지,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특이한 사람이 많지만 박 선생님만큼 희한한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삶을 바쳐 어떤 학문에 매진하는 사람은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하나씩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힘들어 하거나, 거꾸로 사람을 만나면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거나, 또 칼 같이 자신만의 일상 루틴이 있거나, 거꾸로 식사는 거르기 부지기수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는 연구자가 허다합니다. 물론 수학자인 저도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예감이 불쑥 들 때가 있습니다. 어딘가 부족하고 하자가 있어서 그 부분을 숨기기 급급할 때도 많습니다.


사실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가 무언가를 몸소 배우고 있는 동안, 저는 책을 보며 수학을 배우고 익혔으니 말입니다. 수학 속에서는 제가 꽤나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수학을 벗어나 현실로 한 발자국만 나아가면 제가 얼마나 취약한 인간인지 마주합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습니다. 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힘든 일입니다.



태블릿을 들고 소파에 돌아와 앉습니다. 박연호 선생님에 대해 검색합니다. 간단한 소개와 약력이 나옵니다. 남편의 말대로 저명한 뇌과학자이자 명상 지도자입니다. 관련 기사와 사진도 나옵니다. 선생님은 아주 예전부터 대머리여서, 나이가 들지 않은 듯합니다. 인자한 미소도 그대로입니다. 외양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왠지 믿을 만한 사람 같습니다.


인터뷰 기사를 읽습니다. 기사 상단의 사진 속 선생님은 자전거 헬멧 같은 것을 손에 든 채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화면을 아래로 내리다가 중간에 멈춰 내용을 읽어봅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밖으로 나아가는 일에만 광적으로 몰두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만, 균형의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우리가 밖으로,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외곽으로 향할수록, 거꾸로 우리를 돌아보는 법을 잊고 말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우리가 바깥 세상에 대해 알아간 만큼 우리의 내면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알아가야만 합니다. 인간은 안으로도 향해야 합니다. 자신의 안으로 침잠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루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렵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향해야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지난 일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자명한 이치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아주 멀리 떠나갔을지라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각 개인에게 가장 연약한 곳,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으로 이제야 눈을 돌리게 된 겁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단지 우리가 잊고 있었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그 일은 아주 예전부터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우주를 동경하듯, 저 하늘 위에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드넓은 세계를 바라보듯,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안과 밖, 외부와 내부, 외면과 내면의 조화를 꾀하십시오. 한 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상실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땐 우리 모두가 한 곳을 바라보느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는 때였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우리는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누구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선동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각자 개인에게 일어난 현상의 총체인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겁니다.


근면하게 자기 자신을 깊이 바라보십시오. 기민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외부로 나아갈 때에는 명분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로 침잠할 때는 다른 명분은 필요 없습니다. 자기가 자신으로 태어났다는 것, 오직 자기 자신으로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제 안에서 머물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며, 향하기도 하면서, 내면에서 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착실히 해 나가십시오. 지난 일처럼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신 건성으로 하지 말고 하나하나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으십시오. 이전의 인간이 우주로 나아갔을 때처럼 도취되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정직하게, 꾸준하게 수행하십시오.

사실 우리는 우리에게 말고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길은 자신 안으로 통합니다.





월요일 오전 강의를 마치자마자 바로 박연호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출근길에 미리 연락을 남겼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 가능 시간을 정리하여 답장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공원 입구에 다시 서자 흔연한 기분마저 듭니다. 마음 공원의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갑니다.


숲 속에 덩그러니 자리한 두 건물, 그 앞에는 지난번과 달리 주차된 차량이 많습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적이 흐르던 공원 가운데 지저귀는 새소리가 울립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듯하여 주변을 둘러봅니다. 길옆에 바짝 솟은 바위, 그 위에 작고 귀여운 새가 앉아 있습니다. 제가 가까이 다가가자 고개를 빠르게 까딱거리더니 파드득 날아오릅니다. 새를 눈으로 쫓으려 했지만, 아주 날랜 녀석인지 벌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다시 건물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걸어갑니다. 몇 발자국 걷자, 싱잉볼 소리가 마음 공원 가득 울려옵니다. 가로등과 함께 설치된 스피커에서 들려온 듯한데, 그 맑고 청명한 소리가 공원 여기저기로 퍼져나가 무언가를 알리려는 것 같습니다.



명상홀에 가까워지자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서로 말은 없습니다. 그들은 밝은 얼굴로 서로 눈인사 정도를 주고받으며 차량에 올라타거나 나가는 길로 향합니다. 족히 40명은 되는 사람들이 묵언으로 명상홀을 빠져나와 각자 자기 갈 길을 찾는 모습이 어딘가 기이하면서도 세련되어 저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그들의 행색을 관찰합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상한 옷이라거나, 특이한 장신구도 없습니다. 사람이 많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조용합니다. 그들은 하나둘 명상홀을 떠납니다. 차량도 서두르는 법 없이 차례대로 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중에 누군가 옆으로 다가옵니다. 대머리가 바로 눈에 띕니다. 과거 기사에서 본 얼굴과 흡사해서 괜히 반갑습니다.


“김수현 선생님, 오셨습니까?”





22. 기민함과 평정심 _ 수현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브런치북 보러 가기
이전 20화 20. 북극성의 이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