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4)
박연호 선생님의 인사에 저도 답합니다.
“안녕하세요. 아침에 갑자기 찾아뵙겠다고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별 말씀을요.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박 선생님은 명상홀 방향으로 손짓하고는 먼저 앞서 걸어갑니다. 저는 뒤따라 걸으며 묻습니다.
“오늘처럼 사람이 많은 날도 있네요.”
“예. 오전 열한 시 에 한 시간, 오후 일곱 시에 한 시간 해서 하루에 총 두 시간은 공동 명상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아니더라도 명상홀은 항상 열려 있기 때문에 언제든 오셔서 명상할 수 있지만 나름의 공식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입니다. 저도 이 시간에는 꼭 참여하고 있습니다. 해당 시간에는 명상홀에서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시간과 장소를 열어두고 수행을 권장하고 있으니 오셔서 명상하셔도 좋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박 선생님은 신발을 벗고 곧장 명상홀 내부로 들어갑니다. 역시 방석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낮은 조도와 나무의 결이 드러난 실내 때문인지 들어서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선생님은 가장 안쪽 자리에 앉고는 바로 앞 방석으로 제 자리도 안내합니다. 첫 방문 때와 비슷한 과정이지만 이제 당황스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간단한 대화도 없이 바로 명상을 시작합니다. 박 선생님은 지난번처럼 눈을 감고, 팔과 다리를 편안하게 두도록 지도합니다. 저는 남편의 명상 모습을 기억하며 나름 비슷하게 자세를 고칩니다. 사실 크게 다를 것은 없습니다. 싱잉볼이 작게 울리고 다시 목소리가 들립니다.
들숨과 날숨. 호흡. 오르고 내림. 차고 비워짐. 코끝과 코밑의 감각. 더 집중해서 감각을 느끼도록 유도합니다. 저는 그대로 따릅니다. 살면서 제 피부에서 일어나는 감각, 가뜩이나 코 주변의 감각에 이토록 집중해본 적은 처음입니다. 남편도 이런 과정을 겪었다니 신기합니다. 하지만 남편의 겉모습처럼 제가 그와 비슷한 상태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감각의 집중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금방 다른 생각에 전념합니다. 제가 원한다고 해서 생각을 그칠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문득 나긋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알아차릴 뿐 가까이 다가가지도, 멀리 벗어나지도 마십시오. 그저 알아차리십시오. 있는 그대로 두고, 단지 감각의 변화에 기민하게 집중하십시오. 주의가 흐트러지면 다시 돌아오시면 됩니다. 그 뿐입니다.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두십시오. 갈망하지도 회피하지도 마십시오. 잡으려고도 놓으려고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두십시오. 그것이면 됩니다.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십시오.”
선생님의 목소리를 따라 명상을 수행합니다. 눈앞은 시커먼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저도 모르게 다른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내 생각, 남편 생각, 성은이 생각, 수학 생각, 대학교, 연구실의 배치, 강의할 단원, 학생들의 시험지, 오답들, 다시 들숨과 날숨. 학생들의 질문, 정의와 증명, 성은이의 질문, 하늘, 구름, 달, 별, 딸아이의 얼굴, 그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 어딘가에 성은이가 있는 거야, 이토록 생생하다면, 흐릿한 성은이, 가지 마, 얼굴을 계속 보고 싶어, 죽음, 눈물, 잊어야 해, 멀어져야 해, 아니 멀어지기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하는 건데, 억지로 다시 들숨과 날숨. 빈자리, 명제, 차가운 소름, 얼음, 보온, 물, 아주 깊은 물속, 저항, 호흡, 숨 막힘, 어둠, 무섭다, 벗어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다시 들숨과 날숨, 들숨과 날숨, 반복되는……
싱잉볼이 나지막이 울립니다. 저는 잠에서 깬 듯한 호흡을 느끼며 눈을 뜹니다. 이게 뭘까요. 명상 중에 아무 생각도 들이치지 않는 시간이 잠깐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아주 편안한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깊은 물속을 유영하듯 자유로운 순간이 분명 있었습니다. 신기합니다. 남편이 말한 그 평온한 시간을 몸소 체험한 듯합니다. 저는 눈을 여러 번 감았다 뜨며 시야를 회복합니다. 앞에서 박 선생님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저는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천천히 정리하시고 옆방으로 오시지요.”
“예.” 제 목소리는 깊이 잠겼습니다.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명상홀 뒤쪽으로 사라집니다. 저는 천천히 다리를 풀고 여기저기를 주무릅니다. 통증이 오릅니다. 같은 자세로 버틴 신체들이 뒤늦게 경악하는 느낌입니다. 저는 고개와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고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납니다. 왼쪽다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땅을 디딜 때마다 저릿합니다. 잠시 몸을 숙여 종아리를 몇 번 친 후에 걸음을 옮깁니다.
명상홀을 나와 옆방으로 들자, 선생님은 역시 차를 우리고 있습니다. 자리에 앉자 제 앞으로 차를 내어 줍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번 주에 한두 번 더 함께 명상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수요일 이 시간에 괜찮을까요?”
“네. 좋습니다. 그 이후에는 선생님 홀로 명상하셔도 좋습니다. 제게 명상 지도를 더 받아도 좋고, 명상홀에 오셔서 혼자 명상하셔도 좋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그 시간에 함께 하셔도 됩니다. 여기까지 오기가 힘드시면 선생님께서 계신 자리에서 하셔도 무방합니다.”
“그럼 박 선생님을 못 뵙는 건가요? 혈액순환에 좋은 차도 못 마시고요.”
그는 가볍게 미소를 띱니다.
“아닙니다. 미리 말씀하시면 언제든 저를 만나 차를 드실 수 있습니다. 명상을 수행하시면서 질문이 생기면 언제든 제게 물으셔도 됩니다. 이곳에서 명상하시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저와 가끔 면담 시간을 갖습니다. 물론 꼭 면담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박 선생님은 휴대폰을 꺼냅니다. 금세 제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립니다.
“명상하는 중에 도움이 되는 안내서입니다. 내용은 거의 제가 명상 중에 드리는 말씀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만,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먼저 보내드린 책자를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대강 내용을 훑어봅니다. 문답식으로 된 안내서인데, 아직은 어렵기만 합니다.
“감사해요. 천천히 읽어볼게요.”
“사실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직접 경험하는 것, 실천이 중요합니다. 마치 수학을 연구하시듯 그 안의 내용을 숙달하거나 논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알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명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침잠하는 시간을 몸소 갖는 것이지요. 사실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면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그 안의 내용을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자를 받자마자 시간을 들여 정독할 마음을 먹은 저는 멋쩍습니다. 한 쪽도 빠짐없이 모두 읽고 정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어떤 책이든 완독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연구자의 태도가 몸에 밴 듯합니다. 무엇이든지 진지하게 대하는 게 버릇이 됐습니다.
저는 명상 가운데 잠시 맛본 평온을 상기하며 찻잔을 듭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시자 가슴이 따뜻하게 물듭니다. 주변은 고요하기만 하고, 선생님의 시선은 성실합니다. 그 속에서 자문합니다. 어쩌다 내가 여기까지 왔나. 원래는 관심도 없던 명상을 찾아 박 선생님 앞에서 차를 마시는 이 순간이 새롭습니다. 제 자신이 딱하기까지 합니다. 헤매고 헤매다가 결국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힘이 나를 여기까지 착실하게 밀어낸 듯도 합니다. 참으로 가혹한 우연입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우연은 필연일까요. 저는 따뜻한 숨과 함께 말을 내뱉습니다.
“딸아이가 일 년 전에 죽었어요.”
그 문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갑자기 튀어나와 제 스스로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의 뒤를 이을 문장이 수도 없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놀란 기색 없이 지그시 바라봅니다. 그 앞에서 저는 문장을 고르게 됩니다. 신중하게 문장을 고르다가 결국에는 모든 문장을 비약합니다. 제 간절한 바람을 섞어 입을 엽니다.
“명상을 한다면 괜찮아지겠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선생님, 조급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조급해하지 말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제 상황이라면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제 남편도 명상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분명 저도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명상 지도 후에는 홀로 명상을 할 생각입니다. 방금 전 명상 중에 경험한 그 짧은 안온에 기대를 걸게 됩니다.
“예.” 박 선생님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 대답을 얼버무립니다. “그럼 수요일에 뵐게요.”
“네. 김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어 좋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제가 고개를 숙이자 그도 공손하게 인사합니다. 명상홀을 나와 곧장 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많았던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바람만이 드나듭니다. 나무의 잎사귀들은 가만가만 나부낍니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은 여리게 흩어져 내리며 흑과 백만으로 길바닥 위를 모자이크로 수놓습니다. 어떻게 이런 모양을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해 눈을 치켜뜹니다. 잎들을 따라 줄기로, 줄기를 따라 굵은 나무기둥으로 향합니다. 기둥과 줄기는 나무마다 서로 다른 모양입니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나무가 있는가 하면, 이리저리 굽어 오르는 나무도 있습니다. 다양한 꼴의 초목들은 이 공원을 숲처럼 만듭니다. 도시와 동떨어진 곳만 같던 공원이 벌써부터 친숙합니다. 나무 사이로 드는 햇빛과 시시각각 변하는 풀과 나무의 모습에 마음이 뺏긴 채로 걷다 보니 우울하고 슬픈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 공원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빈다면 이곳에 직접 와서 명상도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공원 속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저 멀리 출구가 보입니다. 공원을 벗어날 생각에 벌써 아쉽습니다. 괜히 걸음을 늦추고 키 작은 풀과 돌멩이들을 살핍니다. 아주 천천히 걸어도 어느새 출구가 가까워옵니다. 눈이 부시도록 밝은 볕이 출구에 한가득합니다. 저 햇살 너머가 아주 먼 곳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저는 무언가 두고 온 사람처럼 몸을 돌려 숲 속을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갑니다. 나무 그늘은 서서히 사라집니다. 햇살 속으로 몸을 들이자 눈이 부셔 눈을 질끈 감습니다. 따사한 기운이 피부에 흠뻑 감돕니다. 게슴츠레 눈을 뜨자 저는 어느새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도심 한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싱잉볼의 소리와, 고요한 명상과, 편안한 산책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 것처럼 아련합니다. 홀로 아주 먼 곳에 다녀온 기분이 들어 잠시 눈을 감아 봅니다.
23. 뜻 모를 시선 _ 진영의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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