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 잔을 비운 것을 확인하고 함께 명상홀을 나옵니다. 인사를 나누고 길을 내려가려는데 박 선생님이 뒤를 따릅니다. 저는 의문스러워 그를 바라봅니다.
“배웅해드리려고 합니다.”
“아니에요. 날도 더운데 들어가세요.”
“입구까지만 배웅하겠습니다.”
그는 뒷짐을 지고 먼저 걷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수풀 속에서 지저귀는 새의 소리가 들립니다. 수가 많습니다. 오랜만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도 같고, 함께 노래하는 것도 같습니다.
“박 선생님, 혹시 새 이름도 잘 아세요? 이 조그마한 새들이요.”
그는 수풀 속을 잠시 들여다보고는 답합니다. “참새처럼 작지만, 이 새는 뱁새입니다.”
“이 새가 뱁새였어요? 몰랐어요.”
“이름은 친숙한데 실제로는 어떤 새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눈도 찢어지지도 않고 귀엽게만 생겼습니다.”
우리는 뱁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몇 걸음 걷습니다.
“김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뻐꾸기는 뱁새 둥지에 몰래 알을 놓기도 합니다. 뻐꾸기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뱁새의 알을 둥지에서 밀어 떨어뜨리지요, 이미 태어난 뱁새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기도 합니다. 그게 뻐꾸기의 본능인가 봅니다. 아무도 알려주지도 않았고, 배운 적이 없는데도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런 일을 한다니 기이할 따름입니다.”
이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무수히 벌어지고, 그로 인해 지탱된다고는 하지만 뱁새의 일은 너무도 무정합니다.
“뱁새는 무슨 잘못이에요.”
“실상 뱁새는 알지 못하나 봅니다. 둥지를 독차지한 뻐꾸기 새끼가 자랄 때까지 힘껏 양육합니다. 그러면 뻐꾸기 새끼는 뱁새보다 몸집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도 어미 뱁새는 모르나 봅니다. 남의 새끼에게 먹이를 계속 물어다 줍니다.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 참 오묘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새끼도 못 알아볼 수가 있을까요. 아무리 자연의 일이라지만 제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어요. 저 먼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고작 새의 일들만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뿐이에요.”
“인간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일. 자연은 불가사의한 일들뿐이지요.”
수많은 나뭇잎들이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영롱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뱁새는 보이지 않는데 새소리는 주위에서 계속 울립니다. 그 소리가 어쩐지 구슬프게 들립니다.
박 선생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뻐꾸기와 뱁새. 제가 논리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별로 없다는 걸 이제는 압니다. 속상한 마음을 숨기는 것도 힘들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대로 두려 합니다.
말없이 걸어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며, 저는 명상을 하듯 발밑의 감각으로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뒤꿈치부터 발가락 끝까지 차례로 감각이 이동합니다. 바로 앞의 걸음만 생각하며 호흡하듯 걸었는데 어느새 길 끝이 보입니다. 저와 출구 사이에 박 선생님의 어스름한 윤곽이 자리합니다.
1년 만에 찾아온 저를 편하게 대해준 그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시 1년이 지나도, 또 1년이 지나도,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박 선생님은 공원 한 편에 자리하실 것만 같습니다. 언제든 제가 찾아와도 차를 내어 주며 전심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그의 모습은 마음 공원을 홀로 지키며 살아가는 파수꾼의 인상입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공원만은 든든히 지킬 듯합니다. 저도 마음 공원이 오래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가지며, 앞장서는 선생님을 따라 환한 입구로 다가갑니다.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새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 갑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아 벌써 성은이 기일이 돌아왔습니다. 고작 일 년이 흘렀는데 작년과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오전 내내 집에서 조용히 명상을 했습니다. 저는 성은이 방에서, 남편은 거실에서 따로 명상을 했습니다.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거동을 조심하고 말은 아꼈습니다.
편한 옷을 입고 홀로 명상하는 도중에 지난 1년 동안 가정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새삼 남편에게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제가 우울하여 대뜸 눈물을 흘릴 때에도, 가끔은 이해하지 못할 말을 쏟아내도, 때로는 묵언 수행하듯 입을 열지 않아도 남편은 언제나 곁에 있었습니다.
저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로 제 상태를 확인하고 기다렸습니다. 제가 멀어지려고 하면 남편은 기꺼이 제게 다가왔고, 제가 그를 필요로 할 때에는 바로 옆에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기나긴 시간 동안 남편의 성실한 관찰과 인내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다시 한 번 감동스럽습니다. 명상을 끝내고 눈을 뜨자 이제부터라도 남편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옵니다. 물론 이 다짐이 얼마나 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느지막하게 식사를 한 후에는 남편과 거실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냅니다. 낯이 간지럽지만 오늘 명상 중에 느낀 감사함도 슬쩍 표현합니다. 남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수줍게 웃어넘길 뿐입니다. 예전부터 남편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이 실은 너무 많은 생각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보다 생각도 많고 배려심도 깊은 사람입니다.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남편이 아니었다면 지난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겁니다. 누구보다 독립적인 사람이라 여겼던 저는, 사실 든든한 남편이 곁에 있기 때문에 혼자서 지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혼란스러워 길을 잘못 들지라도 근처에 남편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제 안에 있습니다. 제가 자유로운 만큼 남편은 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매순간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남편의 마음이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자 얼마나 두터웠는지 실감납니다.
남편은 한창 제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시간을 확인합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먼저 집을 나섭니다. 남편은 승합차를 빌리러 가는 겁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오늘 오후에 우리 부부는 집 근처에서 소규모로 운영되는 보육원에 들릴 계획입니다. 남편과 저는 일일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을 데리고 어린이 천문대에 견학을 가려고 합니다. 벌써 긴장도 되고 떨립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물론 보육원 선생님도 대동합니다만, 이 모든 일은 우리가 꾸민 일입니다.
가장 처음은 남편의 제안으로 시작됐습니다. 성은이를 우주장(宇宙葬)으로 옮긴 후에 남편이 조심스럽게 뜻을 전했습니다. 딸아이 기일마다 아이들과 함께 별을 보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흔쾌히 승낙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누구를 데리고 갈지,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세부적인 일들이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혼자서 어린이 천문대 견학에 필요한 세목들을 도맡아 순식간에 정리하고는 제게는 몸만 따라오면 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남편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저는 꽤나 골머리를 앓으며 지지부진했을 텐데 말입니다. 저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서 간식은 제가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간식도 만들어야 하고 나갈 채비도 해야 합니다. 얼른 몸을 일으켜 소매를 걷어붙입니다.
우리 부부는 보육원 앞에서 만나 아이들을 승합차에 태우고 어린이 천문대로 향합니다. 저는 조수석에 앉아서 쭈뼛쭈뼛 아이들을 돌아봅니다. 일곱 명의 아이들은 초등학생인 듯하고, 대부분 저학년으로 보입니다. 제 걱정과는 달리 설레는 눈치입니다.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서로 재잘거리다가, 이내 선생님에게 질문을 쏟아냅니다. 우주는 얼마나 넓은지, 우주비행사는 어떻게 되는지, 외계인은 있는지, 별은 얼마나 많은지 멈추지 않고 묻습니다. 저라면 그 많은 물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당황했을 텐데 보육원 선생님은 오늘 천문대에 가서 다 같이 알아보자며 능숙하게 아이들을 다룹니다.
그 후에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질문을 되물으며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 나갑니다. 선생님의 말씨와 기품에서 아이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그 앞에서 저는 몰래 성은이 생각을 합니다. 성은이도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보고 싶은 마음이 솟습니다. 성은이도 저한테 궁금한 것을 잔뜩 물었을 겁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도 신이 나서 말했겠지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저는 가끔씩 놀라며 딸애를 기특하다는 듯 안아주었을 겁니다.
잠시 돌이켜 보니 제가 딸아이에게 세상을 하나씩 알려준 것이 아니라, 성은이가 제게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려준 것 같습니다. 성은이는 제게 새로운 눈이었고,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딸아이가 머금고 있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생각만 해도 벅차오릅니다.
뒤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아이가 보육원 선생님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별은 낮에 어디에 있다가 밤에 오는 거예요?”
저는 미소를 짓고 맙니다. 옛날에 성은이의 질문과 대답이 떠오릅니다. 저도 열심히 답했던 적이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별을 보러 갔을 때, 그날이 새록새록 떠올라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뻗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뒤에서 아이의 질문에 답하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은 모두 말을 그치고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맞습니다. 별은 태양의 밝은 빛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겁니다. 저 위에 있지만 마음처럼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지면 하늘 위에 있는 별들은 그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 별빛처럼 뒷좌석 어딘가에 성은이가 앉아 있는 것만 같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는 않을까. 꼭 그랬으면 좋겠다.
설레는 마음으로 성은이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운전하는 남편에게 눈길을 돌립니다. 넉넉한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만 아는 암호를 은밀히 확인하듯 눈짓을 주고받습니다. 저는 다시 눈을 들어 파란 하늘과 그 너머를 눈에 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