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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화 Oct 27. 2024

40. 허상의 형태

수현 (3)






어느새 여름의 끝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번 겨울이 엄청 춥더니 아직도 더위가 기승입니다. 오늘은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었습니다. 성은이의 방에서 짧게 명상을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오늘은 연구실이 아니라 마음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입구에 서서 그 안을 들여다봅니다.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저 끝은 어둡기까지 합니다. 한 걸음씩 공원 안으로 몸을 들입니다. 햇빛은 따가워도 공원의 그늘 속은 덥지 않습니다. 곧장 제가 가장 마음에 드는 곳으로 걸어갑니다. 여전합니다. 전과 같이 참으로 좋습니다.


하늘을 조각내듯 경계를 이루는 나뭇잎들, 새소리, 매미의 소리, 공원 밖과는 다르게 선선한 바람마저 지납니다. 그 바람결을 맞으며 주위를 배회합니다. 늦여름의 그늘 속을 충분히 누비다가 명상홀로 향합니다.



방으로 들자 박연호 선생님은 역시 차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볍게 목만 숙여 인사를 나눕니다. 저는 조용히 자리에 앉습니다. 찻잔에 차를 따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오래 전부터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 어디 편찮은 곳은 없으셨지요?”


“그럼요. 박 선생님도 잘 지내셨어요?”


“네, 저도 무탈했습니다.” 그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을 붙입니다. “오늘은 어떤 일로 걸음하셨는지요?”


선생님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합니다. 지난 번 면담으로부터 거의 일 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어제 만난 사이인 것 같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 덕에 저도 괜한 미안함을 한시름 놓을 수 있겠습니다. 저는 가방에서 명상 모자가 든 상자를 꺼내 탁자 위에 둡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거 돌려드리려고요.”


“돌려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선생님 편히 사용하시라고 드렸습니다.”


“아니요. 이제 괜찮습니다.” 상자를 박 선생님의 방향으로 슬쩍 밉니다. “다음에 또 필요하면 말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저를 바라봅니다. “작년 마지막 면담 이후로는 사용하지 않으셨는지요?”


“아니요. 명상 모자 없이 명상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제 기억이 옳다면 지난 면담이 가을쯤이었으니, 일 년이 조금 안됐습니다. 지난번 면담에서 전해 주신 말씀만으로도 선생님께서 침잠한 상태에서 겪은 경험이 감당하기 쉽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죄송해요.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해서.”


“아닙니다.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찾지 않은 이유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 죄송해요. 나쁜 뜻은 아니에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합니다.” 선생님의 표정은 이상하게 밝습니다. 저를 느긋하게 쳐다봅니다.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묻고 싶습니다만, 이제는 말씀해주셔도 괜찮으신지요?”



저는 잠시 고민하며 말을 고릅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갈피가 잡히지 않습니다. 불현듯 성은이를 안고 있던 명상의 경험이 아스라이 오릅니다. 차를 마신 듯 훈훈한 기운이 가슴께에서 감돕니다. 박 선생님께 그동안 있었던 일을 풀어놓기 시작합니다.


명상 속에서 성은이를 만난 직후 박 선생님을 찾아왔던 가을, 명상의 경험이 사라졌던 겨울, 다시 마음을 다잡았던 봄, 제 마음속을 수도 없이 오갔던 여름, 그 계절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합니다. 제가 느낀 것과 알아낸 것, 착각한 것과 배운 것, 새롭게 깨달은 것을 말합니다. 말하면 말할수록 선생님의 표정처럼 제 마음도 차분해집니다. 그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저절로 흘러나옵니다.


성은이의 마음, 엄마의 마음, 수학자의 마음, 선생의 마음, 대가의 마음, 제자의 마음, 명상가의 마음,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하나의 마음, 오늘날 박 선생님을 찾기 직전까지 겪은 내밀한 일들,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한 문제들……


말을 마치자 박 선생님은 차를 음미하듯 천천히 마십니다. 그의 표정은 제 얘기를 듣기 전과 후가 똑같습니다. 하지만 분명 선생님은 제 이야기를 모두 귀담을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그 안에서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있을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엽니다.


“그럼, 김 선생님은 문제를 해결하셨는지요?”



저는 차를 마시며 코끝과 인중에 닿는 온기를 흠뻑 느낍니다.


“아니요. 이건 평생 걸리는 일인걸요. 지금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예전처럼 막막하지도 않아요. 제가 명상 모자를 돌려드리려고 온 이유이기도 한데, 얼마 전부터 명상 경험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 미지의 공간마저 깔끔하게 사라졌어요. 작년 겨울 같았으면 또 불안해하면서 미련하게 명상만 하면서 지냈겠죠. 지금은 아니에요. 예전처럼 슬프거나 안타깝지는 않아요. 솔직한 제 마음으로는 이제 그럴 때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에요. 초여름부터 그곳을 오가면서 후회 없이 마음껏 누렸어요. 처음에는 차갑기만 했던 그 물속은 아주 조금씩 따뜻해졌고, 마지막에는 몸을 느긋하게 풀어도 좋을 만큼 알맞았어요. 한동안 저는 그 속을 유영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안식을 경험했어요. 성은이가 있던 곳에서요, 그곳은 마치, 맞아요. 아이가 제게 남긴 마지막 선물 같았어요. 그렇게 여름 내내 온유한 상태로 편안하게 지냈어요. 그러다가 얼마 전에 침잠한 상태가 완전히 사라진 거예요. 조금 놀라서 처음 며칠은 멍하니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규칙적인 명상은 쉬지 않았어요. 후로 명상 중에 그 무엇도 볼 수 없었지만 아쉽지는 않아요.”


저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잇습니다.



“그 후에 남편과 고민하다가 딸아이 이장을 결심했어요. 우주장으로요. 다른 사람은 욕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명상 경험이 끝나자마자 제 할 일을 확실히 알았거든요. 다음 할 일이 제게는 너무도 자명했어요. 분명 성은이도 원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네, 아주 잘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의 선량한 눈빛에서 진심이 엿보입니다. 그 무조건적인 따듯한 시선은 쉽게 마주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이 순간만큼은 오직 저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예상치 못하게 마음이 울컥합니다. 저는 조용히 차를 목으로 넘기고는 답합니다.


“감사해요. 아마 제가 그 말을 듣고 싶었나 봐요.”


“김 선생님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드는 일을 후회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김 선생님의 마음을 의심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동안 제 마음을 성실하게 들여다봤어요. 이제는 선생님께 감히 물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박 선생님은 오랫동안 진지하게 수행하셨잖아요. 선생님은 그 마음이란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히 아셨나요?”



“충분히 고민하시고 말씀을 넘겨주셨으니, 마땅히 저도 제 생각을 편히 꺼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한 때 저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 자신 안에 있지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그것, 인간이 태어나고부터 죽을 때까지 스스로도 풀지 못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수수께끼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망각했습니다. 그 본능까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 추동을 분명 느끼지만,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욕구로 대체한 것 같습니다. 그나마 취할 수 있을 만한 것들, 눈만 뜨면 보이는 것들, 대중이 바라는 것들 말입니다. 그런 유행의 관성으로 우리는 마침내 극단의 시기에 도착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주를 바라보았던 겁니다. 외부의 것들 중에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지요. 저는 그 시기의 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두 가지 모두 중요한 일이라는 겁니다. 바깥으로 나아가 찾는 일과, 안으로 들어가 침잠하는 일. 외부의 세계를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내부의 세계를 바깥에서 이뤄내는 일 모두 중요합니다.”


“누구나 그 끝에서 알 수 있을까요? 자신의 마음과 감정들,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현상들, 안팎으로 일어나는 문제의 이유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수행을 하면서 한 가지는 확실히 경험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제 자신도 시시때때로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나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의 나, 지금의 나, 잠시 후의 내가 같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아주 찰나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것입니다. 빛이 그 사물에 닿고 나의 동공으로 돌아와 시신경을 자극하고 뇌로 전달됩니다. 그 과정은 우리가 느끼지 못할 만큼 순식간이지만 확실히 시간이 드는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자신을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과한 비약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잘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를 정의할 수도 없습니다. 각각의 지난 어떤 모습을 보며, 마음속에 대표되는 상을 만들뿐입니다. 때로는 왜곡되기도 하고, 자신이 바라는 상을 그리기도 합니다. 믿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의심하며 질문합니다. 마음이란 것도 허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그저 우리가 당연히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그 마음의 이름과 모양을 스스로 만들어냈을 뿐이지, 마음이란 것도 사실은 우리의 몸처럼 시시각각 변하여 결국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답은 우리가 알 수 없지요. 없고말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연구하고 수행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네, 이 세상에 어떤 것보다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명상을 수행하시면서 가끔씩 말씀 나누는 것도 좋겠습니다.”


저는 마치 박 선생님의 동료 연구자가 된 것처럼 뿌듯한 기분이 듭니다. 우리는 동시에 차를 한 모금 마십니다. 따뜻한 날숨을 내쉽니다. 다시 차 한 모금을 목으로 넘깁니다. 안락한 침묵 속에서 함께 호흡합니다.






41. 돌아온 기일 _ 수현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마음의 위상 1부 보러가기 (01 -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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