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다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명상이었습니다. 저와 명상 사이에 있는 것을 스스로 더하고 제했습니다. 박 선생님은 잠시 잊기로 했고, 수학을 할 때의 마음가짐을 단단히 기억했습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마음을 더 편히 갖춰야 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는 아주 천천히 풀어야 합니다. 하지만 매일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조금씩 성실히 풀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문제가 손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때부터는 종이와 펜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그 문제를 풀 수 있게 됩니다. 그 지점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언제든 고민할 수 있다고 해서, 언제나 꺼내 보면 안 됩니다. 그건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다가는 문제가 삶을 완전히 잠식해서 일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때에 맞춰 밥도 먹고, 늦지 않게 잠도 자고, 알람이 울면 지체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원치 않는 순간에 대뜸 솟아나 여기저기 손을 대려는 그 문제를 잠시 잊기 위해서 활동적인 운동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다시 문제를 풀러 가는 겁니다. 그 문제 속으로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다시 명상을 시작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기 중에 그만큼 연구자처럼 지낸 기간은 없을 겁니다. 겨울을 지나 봄을 거치면서 마음도 한결 더 편해졌습니다. 그 덕분인지 비현실적인 명상의 경험도 조금씩 다시 재생됐습니다. 동시에 실망감도 커졌습니다.
검은 구멍, 알록달록한 색점들, 검은 아지랑이, 점멸하는 빛의 원들을 마주하고 기민한 호흡을 유지하며 그 속으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성은이가 없었습니다. 물속인지 눈 속인지 모를 곳에서 만난 딸아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진득한 수중, 회오리치는 물결, 사라지는 액체, 별빛 같은 함박눈,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성은이만 보이지 않는 겁니다. 저만 그곳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외로웠습니다. 눈을 감은 채로 주위를 둘러보며 성은이를 찾았습니다. 검은 수막의 형태도, 인간의 형태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성은이는 사라지고 이 세상만 남은 걸까. 왜 나만 남은 걸까. 도대체 여기는 어딜까. 이건 아주 어려운 문제이고, 그렇기에 더더욱 혼자서 풀어내야만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겁이 났습니다. 겁을 잔뜩 먹어서 한겨울의 추위를 느끼듯 몸이 저절로 떨렸습니다.
저는 수학자이지만 지금까지는 풀만한 문제만 골라 풀며 살았다고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세상에는 죽기 전에 풀지 못할지도 모르는 거대한 문제를 붙잡은 수학자들이 있습니다. 제가 푸는 문제와는 격 자체가 다른 명제들입니다. 예전부터 저는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비교하자면 저는 수학이라는 분야에 절반쯤만 발을 걸친 채로 연구하고 있는 셈일 겁니다.
어떻게 그들은 전력으로 매진할 수 있을까, 그건 너무 어려운 문제인데.
때로는 미련한 일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뒤늦게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성은이를 선택한 게 아니라 성은이가 저를 선택한 것처럼, 제가 명상의 장면을 선택한 게 아니라 그 반대인 것처럼, 그 연구자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들이 난제를 선택한 게 아닙니다. 난제가 그들을 선택했던 겁니다. 그들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고, 족쇄이기도 하고, 상처이기도 하며, 회복이기도 한 것입니다. 도저히 그 문제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문득 그때가 기억났습니다. 예전에 해외 학회에 갔다가 평생 동안 난제를 풀기 위해 연구하는 원로 수학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푸는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것을 다루는 대가였습니다. 저는 우연찮게 그의 옆에 앉아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저는 그 자리에서 주제넘게도 난제를 푸는 일이 힘들지는 않은지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씩 풀어 나가는 것이죠. 갈 수 있는 만큼 가면 그것으로 족해요. 어제보다 덜 갔다고 해서 조급해 하지도 않고, 어제보다 더 갔다고 해서 자만하지 않으면서 한 걸음씩 다가가는 것이지요. 우리 수학자들은 모두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당연히 우리 모두 길을 잃기도 하죠. 도무지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모를 때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지 몰라 손을 놓고 있을 때요. 그럴 때 나는 직감을 믿어요. 잠시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고, 꽤 괜찮아 보이는 곳을 미리 점찍어 두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걸음도 떼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다시 걷는 거예요. 그뿐이죠.”
부분만 기억하고 있던 대가의 답변이 명상 중에 조금씩 떠올라 살이 붙어 마침내 온전하게 완성되었습니다. 과거에 그 수학자를 만난 일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가 제게 해준 말이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그의 대답은 아직까지도 큰 도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온 후에도, 저는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그 덕분에 기나긴 계절을 그나마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예전처럼 무작정 명상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손쉽게 제 시간을 갉아먹으려는 명상을 경계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각에 명상을 시작하고 끝냈습니다.
오전에는 연구실에서, 밤에는 성은이가 썼던 텅 빈 방에서 수행했습니다. 성은이가 사라진 그 자리를 성실하게 오갔습니다. 그곳은 몸이 떨릴 정도로 무척 차가운 물속 같습니다. 그 속에서 저는 호흡과 함께 제 몸으로 물결을 흘려보내다가 돌아오곤 했습니다. 계속해서 성은이를 만났던 곳, 그 알 수 없는 장소를 왕래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왜 아무도 없을까. 여기는 어딜까.
게으름피우지 않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명상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지켜봤습니다. 제 잠정적인 명제로는 그렇습니다. 그 명상 경험은, 성은이가 있던 그곳은, 마침내 저만 홀로 남은 그곳은, 제 마음일 겁니다. 아주 깊은 제 마음속 말입니다.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침잠한 상태에서 마주한 현상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듯했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어요. 과연 온전히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요.
얼마 전에 수업을 준비하면서 전공 강의 노트를 정리하다가 위상수학의 도형들을 발견했습니다. 만드는 법과 특이한 성질들, 이리저리 구부러진 면,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된 선들과 점. 특히 뫼비우스의 띠가 눈에 띕니다.
박연호 선생님과의 첫 만남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라 꼬아진 도형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사실은 한 면이지만 실제로 반대편으로 가려면 길게 돌아가야 합니다. 한참을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게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면에 있는 것 같아도, 모든 점이 분명 연결되는 겁니다.
얄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야말로, 우리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반대쪽에 있는 대상인 듯합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것 같지만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숨겨진 것도 같고, 때때로 큰 영향을 끼치지만 막상 찾으려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시 어렵기만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마음을 직접 본 적도 만진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마음껏 상상할 수도 있는 이유이기도 하면서, 우리가 마음을 알고자 하는 욕구의 영원한 동기인 것입니다. 제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진지하게 알아가고 싶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명상의 장면을 꾸준히 드나들며 제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