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바이올린 선생님께서 저에게 "동생은 여우 같은데, 너는 곰 같아."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동생은 딱 필요한 만큼만 연습하고 나가 놀기 바빴지만, 저는 달랐습니다. 선생님이 그만하라고 하실 때까지, 때로는 그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활을 켰습니다. 그저 '나는 실력이 부족하니 열심히라고 해야 돼'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수채화를 그릴 때도 그랬습니다. 더 이상 채색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붓을 놓기 힘들었습니다. 수채화는 유화와 달리 덧칠을 할수록 색이 탁해집니다. 과감히 붓을 놓고 새로 그림을 그려야 된다는 것을 알지만 붓을 놓지 못하고 계속 덧칠을 하다가 결국 그림을 망치곤 했습니다.
임용고시를 통과하고 처음 발령받은 학교에서의 직장 생활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아빠에게 힘든 일을 이야기하면 "나는 잘 모르니까 엄마랑 이야기해라" 하시며 회피하셨고, 엄마에게 털어놓으면 "너만 힘든 것 아니다. 다 힘들다", "그것 하나 못 이겨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거냐?"라는 말만 돌아왔습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잘한다는 칭찬보다는 "선생님, 교직 사회 좁아요. 잘하세요."라는 경고 섞인 말만 들었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열심히 했을 뿐인데, 주위에서는 더 열심히 하라 하고 제 능력 밖의 것을 요구하니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아침에 눈 뜨는 게 두려웠고, 차라리 이대로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혹여라도 사표를 낼까 봐 늘 안절부절못하셨습니다. 그때는 더 심했죠. 가족과 멀리 떨어져 혼자 살다 보니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원래도 생각이 극단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지만, 그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어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기록이 남으면 승진이나 학교를 옮길 때 불이익을 받을까,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까 두려워 병원조차 갈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관식이가 딸 금영이에게 "안 되면 빠꾸!"라고 말하는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았습니다. 저에게도 안 되면 빠꾸라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첫 학교에서 5년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학교로 옮기니,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학교만 가도 숨이 턱턱 막혔는데, 직장을 바꾸니 주위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전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새로운 학교에서는 예의 있다며 그 행동들을 좋아해 주더군요. 좀 더 용기 내어 빨리 직장을 옮기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였습니다. 대체 무엇이 무섭다고 그토록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깟 소문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 떠들어대는, 저를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일 뿐인데 왜 그렇게까지 위축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무너지다가 보니 어느 순간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마저 잃어버린 채 그냥 가만히 굳어버린 것 같습니다.
힘들게 버틴 5년이라는 시간이 모두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빠르게 그곳을 벗어날 것 같습니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오래 앉아 있는다고 해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악기 연습을 바보같이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연주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닙니다. 그림 그리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우리는 잘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때로는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지 않게 놓아야 할 때 놓을 용기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곳에서 버티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것 같아도, 막상 그곳을 나와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새로운 선택지와 삶의 방향이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바보같이 버티기만 하면 서서히 무너지다가 부서집니다. 놓아야 할 때는 놓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