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진로가 바뀌었어요

by yuri

고등학교 담임교사로 지내다 보면 종종 듣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님, 부모님과 상의해 봤는데 진로가 바뀌었어요."

이 짧은 말속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 두려움과 호기심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로는 '확정'이 아닌 '탐색'의 연속이다

일부 선생님들은 생기부에 진로가 자주 바뀌면 불리할 수 있기 때문에 진로 희망분야에 ‘진로 탐색 중’이라고 적는 것을 추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생각입니다.

진로 희망 분야는 반영되지 않지만, 진로 특기사항은 입시에 반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기사항은 분명한 방향성을 갖고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로 탐색 중인 학생이라고 특기사항을 비워놓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진로가 정해져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내 성장 스토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로를 정하지 않고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 과정을 생생하게 글로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활동을 왜 했는지’, ‘이 활동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지’, ‘어떻게 다음 단계로 확장시킬 것인지’를 특기사하에 잘 드러내야 되는데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기-승-전-결이 맞춰진 글을 쓰기 어렵습니다.


먼저 '관심 있는 분야'부터 시작하자

저는 학생들에게 "진로가 바뀌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라는 말을 합니다.

중요한 건 해보는 것입니다. 가장 관심이 가는 것, 재미있어 보이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학생들에게 자기 장점을 적으라고 하면 "목표가 생기면 열심히 합니다"라고 하는데 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회피하거나 피하려고 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목표 설정이 어려운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시작부터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기 때문이지요.


전공-직업 미스매치, 한국의 현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전공 선택의 관점에서 본 대졸 노동시장 미스매치와 개선방안’ 보고서를 냈습니다. 이에 따르면 2015년 OECD가 고등교육(전문대졸 이상)을 이수한 25∼34세 임금근로자 중 최종 이수한 전공과 현재 직업 간 연계성이 없는 비중을 계산해 보니 한국의 전공-직업 미스매치는 50%에 달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이공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이 발표한 ‘과학기술 전공자 취업 현황 분석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과학기술 전공자의 46.7%가 비과학기술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과학기술 전공자 2명 중 1명이 전공과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는 말이죠.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학생들만 간다는 서울대학교 역시 진로 선택 과정과 그에 맞는 전공 설계 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센터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진로란 '마라톤의 이정표' 같은 것이다

마라톤을 뛰는 선수들은 골인 지점만 보고 달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코치들 역시 "우리 딱 저기까지만 달리자!" 하며 단기 목표를 계속 제시해 줍니다.

고등학교에서의 진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의 지금 이 시점은 잠깐 머무르는 급수 지점일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진로는 수정되는 것이 정상이고, ‘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의미 있는 출발입니다.


대학이 보는 건 '탐구력'이다

자유전공학부 관련 질의응답시간이었는데 입학사정관이 "중간에 진로가 바뀌어도 괜찮냐"라는 질문에 "진로의 일관성보다는 탐구력을 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건 자유전공학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좁고 깊게 땅을 파는 것입니다. 파다 보면 '이건 아닌데' 싶어서 다른 곳을 팔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해본 사람이 더 잘한다고 땅을 깊게 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다른 곳도 더 잘 팝니다. 그리고 실패를 너무 두려워하거나 아까워하지 마세요. 다양한 분야를 시도해 본 경험은 대학 면접에서도, 나중에 사회에 나가 일을 할 때도 큰 자산이 됩니다. 문이과가 통합되고, 학문의 융합을 강조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얕고 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큰 장점이 됩니다. 베스트셀러 중에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라는 책도 있잖아요. 그러니 진로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걱정하기보다는, 탐구의 흔적을 어떻게 남길 수 있을지를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정답은 없다. 시도하는 사람이 성장한다

가끔 여행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뜻밖의 횡재를 하곤 합니다. 아무 기대 없이 들어간 식당인데 알고 보니 대박 맛집이었던 거죠. 진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몰랐지만, 가다 보면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고, 좋아하니까 그 일을 반복하게 되고, 반복하다 보니 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자신의 재능을 찾아 한번에 잭팟을 터트리려고 하지만 전문가가 된다는 건 그 분야와 관련된 뛰어는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하게 될 때까지 여기저기 땅을 하면 언젠가는 금광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일 금을 발견하지 못해도 뭐 어떤가요.

이솝 이야기 중에 "값진 유산"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게으른 세 아들은 아버지가 포도 농장에 숨겨놓은 보물을 찾기 위해서 매일 같이 포도밭은 파헤쳤고 보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실망했지만 보물을 찾느라 포도밭을 잘 일군 덕분에 가을에 포도가 풍성히 열려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건 직접 해보는 경험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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