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지난온 삶이 궁금해졌다.
* 아래와 같이 엄마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나:
엄마는 어린 시절 중에 어떤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올라
엄마:
8살인가 그렇게 됐을 거야.
아버지가 어디 가려면 꼭 내 손을 붙잡고,
아들이 아닌데도 그렇게 데리고 다니더라고.
나 클 때 흉년이 들어서 그렇게 배를 고프고 자랐거든.
나는 맨날 어렸어도 아버지 논에 쟁기질하러 가면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서 쑥을 뜯었어
나도 아버지한테 참 사랑받고 컸어.
나:
엄마 어릴 때 외할아버지한테 사랑 많이 받고 컸구나. 계속 사랑 많이 받았어?
엄마:
근데 우리 엄마가 이제 딸만 여섯을 낳아서, 집 안에서 아들이 있어야 한다고, 작은 마누라가 들어와서,
바로 밑에 여동생하고 나하고 둘만 놔두고 우리 엄마가 이제 집을 나갔지
나:
그러면 외할아버지는 부인이 두 명인 거야?
엄마:
아버지도 이제 아들을 낳고 싶었지. 작은 마누라가 들어와서 한 3년인가 4년 살았어.
그때 옛날에는 방이 하나밖에 없었어. 그 방에서 그 작은 마누라하고 아버지하고
우리 다 한꺼번에 자는데 여동생하고 나하고 떠들고 야단이니까 쫓겨나서
그 겨울에 바깥의 길바닥에 나와서 쪼그리고 앉아 있었지
작은 마누라 들어오기 전에는 아버지가 나한테 그렇게 잘했었어.
작은 마누라가 집안 물건을 다 가져다 팔아 쓰고는 내가 그랬다고 아버지한테 이르니까
아버지는 작은 마누라 말만 듣고 그렇게 나를 혼내는 거야
하루는 아버지가 다리를 걷으라 해서 때리니까 막 피가 터지고 그랬잖아.
너무 억울해서 학교도 팽개치고 바로 집 앞에 방을 얻은 엄마한테 그냥 가버렸지
내가 국민학교 때 학교를 거의 안 다녔어. 1학년 때는 잘 다녔지.
엄마한테 가면, 엄마가 앉혀 놓고 막 이것저것 해 먹이고 하다 보니까,
에잇 그까짓 학교는 다녀서 뭐 해 2학년 때부터 인가 학교도 안 가고
그냥 엄마한테 가 버린 거지, 그래서 내가 공부를 제때 못 한 거지
그때는 그냥 엄마만 그렇게 좋아서, 그 9살 먹은 철부지 애가 뭐를 알겠냐 인제 와서는,
‘한글이라도 깨우치고 그랬어야 했는데 왜 그걸 안 했는가’
후회해 봐야 뭔 소용이 있어
나:
엄마가 그래서 공부도 제대로 못 했구나!
외할머니가 쫓겨난 것도 그렇지만, 외할아버지 사랑이 작은 마누라한테
옮겨간 것도 되게 서러웠겠다.
엄마:
서러웠지. 그렇게 나한테 잘해주던 아버지였는데,
내가 나중에는 아버지한테 정이 떨어져 버렸지. 너무너무 서러웠지.
그 시절에는 아주 부잣집 말고는 죽도 못 먹을 형편이 되어서 맨날 배를 곯고 그러니까
내가 14살인가 15살인가 됐는데 그때서부터 이제 입이라도 하나 덜라고 나를 남의 집으로
식모살이를 보낸 거지
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엄마를 식모살이로 보냈어?
열다섯 살인데?
엄마:
그때는 다 그랬어 배를 곯고 먹을 게 없으니까,
끼니를 해결하려면 어떡하냐?
나:
끼니 해결하는 게 힘들었구나,
식모살이 갈 때 서울에 아는 집이 있었어?
엄마:
우리 집 뒤에 사는 형식이 엄마라고 있었는데, 그 집이 좀 부자로 살았어.
형식이 엄마가 형식이를 대학을 보내려고 그랬어.
서울에 형식이네 작은 집이 있는데 거기로 보낸 거야
고등학교부터 서울서 학교 다니게 하려고,
형식이 따라서 형식이네 서울 작은 집 가서 살았어.
나한테 형식이 밥해 주라고 형식이 엄마가 나 월급까지 다 대줬지.
형식이는 그때 고3인가 그랬지.
형식이 서울 작은 집이 장사해서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그랬어
그래서 그 집 살림도 내가 도와주고 그랬지.
나:
엄마 열다섯 살에 낯선 서울집 가서 식모살이하는데 안 서러웠어?
엄마:
배 안 곯고 뜨거운 볕에 나가 농사짓는 것보다는 나아서 괜찮았어.
나:
형식이가 고3이면 엄마랑 나이 차이가 크게 안 났네.
형식이는 공부하러 서울 가는데, 엄마는 뒤치다꺼리하러 따라가는 게 괜찮았어?
엄마:
그냥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
식구들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겠다는 그런 마음만 먹었지
나 어릴 때부터 항시, 내 동생들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나는 이모네 집에서 얻어먹고 왔으니까 나 먹을 것은 동생들 주라고 그랬지
나는 그때서부터 배를 많이 곯고 동생들을 많이 생각했지
내가 그래도 그 남의 집 식모살이하면서 할아버지 털 잠바 다 사서 보내고
벌어서 시골 엄마한테도 돈 다 보내고 그랬잖아.
내가 또 다른 집 식모살이로 옮겨 다니고, 서너 번인가 옮겨 다니면서
서울에서 다 벌어서 스물다섯에 시집갔지
결혼식을 춘천에 무슨 회관인가 하는 곳에서 했어. 결혼식장도 아니고 ..
그런데 나 결혼식 날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아무도 안 왔다.
나:
결혼식 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오지 않으셨어?
딸 결혼식인데?
엄마:
엄마하고 아버지하고 서울로 오길 했냐, 누가 왔냐, 아무도 안 왔다.
결혼하고는 위 동서랑 한집에 4년을 같이 살면서 온갖 위 동서 시집살이는 다 당했지
그 문댕이 같은….
그리고 이제 아버지하고 살면서 느그 아버지가 그렇게 속을 썩였지
나:
큰엄마가 엄마한테 한 시집살이는 유명하잖아. 엄마한테 틈만 나면 악담 퍼붓고,
겨울 얼음물에 빨래시키고, 집안 궂은일 다 떠맡기고,
우리 이모들이 괜히 큰 엄마 라면 학을 떼겠어.
엄마는 제일 예쁠 나이인 스무 살에 가장 좋은 기억은 뭐야?
엄마:
스무 살에 활짝 펴 본 적이 없지 그냥 남의 집 살림한 거밖에 없어
나:
엄마의 스무 살은 활짝 펴본 기억이 없구나. 마음이 좀 짠하네!
그러면 엄마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야?
엄마:
나는 진짜 행복한 것은 그때 8살 때인가 아버지하고 여기저기 다닌 거
그거 말고는 크게 행복이 없어 그래서 내가 지금도 가만히 생각하면,
참, 내가 뭔 이렇게 팔자를 타고났나..그런 생각이 들어가
엄마의 얘기가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아들 못 낳아 쫓겨난 외할머니 이야기,
외할아버지 둘째 마누라 때문에 설움 받은 이야기, 제때 공부 못해 한 맺힌 이야기,
열다섯 살부터 서울 식모살이한 이야기들까지!
들을 때마다 ‘아 또 저 소리다’하고 흘려듣곤 했었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글로 마주하니
너무 다르게 와닿았다. 열다섯 살 소녀의 엄마가 너무 안쓰럽고, 짠해서 눈물이 계속 났다.
부모와 여섯 동생에게 보탬이 되려고, 낯선 서울 땅 식모살이하는 열다섯 살 소녀의
고달픔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저 고생하며 산 엄마니까, 내가 이해하고 참아야 하는 존재’가 아닌,
팔순인 엄마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 열다섯 살 소녀를 이제야 제대로 만난 것 같다. 이젠 내가 춥고 배고팠던 열다섯 살의
소녀를 따뜻하게 꼭 안아주고 싶다. 이 과정을 지금이라도 한 것이 참 감사한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