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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자 없이 남았다

감정을 놓고 감정으로 연결되다

by 은혜



딸이 워킹홀리데이로 떠난 날, 남편은 대형 TV 앞에서 리모컨을 눌렀고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할 말도, 먹을 것도 딱히 없었다. 그날 이후, 저녁 식탁은 더욱 조용해졌다. 딸이라도 있어야 한두 마디 오갔는데 이젠 밥을 씹는 소리만 맴돈다. 남편은 TV를 본다. 나는 남편의 뒤통수를 본다. 말없이 있는 건 서로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그저 말 붙일 이유를 못 찾는 거다. “내가 차릴게.” 그 말 한마디만 건네도 분위기가 좀 풀릴 텐데 이상하게 그 말이 안 나온다. 그냥 각자 밥 차려먹고,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남편은 컴퓨터에, 나는 핸드폰에 묻힌다.


가끔 딸에게 연락이 오면 우린 갑자기 활기를 찾는다. “뭐래? 어디래? 사진 좀 보여줘 봐.” 그렇게 딸 얘기할 때만, 우리 부부는 조금씩 다시 말을 시작한다. 그것도 딸이 남긴 잔향 속에서만. 이쯤 되면, 딸이 중간에서 우리 부부를 ‘대화하게 하는 존재’였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그 조율자가 사라지고 집 안엔 각자의 침묵만 남았다.


딸이 워킹홀리데이 떠난 지 한 달쯤 됐나. 남편이 뜬금없이 말했다. “바람이나 쐬러 갈까?” 천만년 만의 둘만의 외출. 늘 셋이 가던 그 길을, 이제 둘이 간다. 가던 길이던가 싶게 낯설었다. 무슨 호수였는데, 이름도 기억 안 난다. 차 안에선 음악만 흘렀고, 도착해서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한여름인데, 웬 고추잠자리가 호숫가를 맴돌았다.

“여름에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네.”

내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깨니, 남편이 툭— 한마디 한다.

“지들이 날아다닐 만하니까 날아다니겠지.”

그날의 대화는 딱 그게 다였다. 고추잠자리만 계속 날아다녔다.


남편은 앞서 걸었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보였다. 유난히 늘어난 흰머리, 예전보다 더 좁아진 어깨. 그동안은 몰랐다. 딸이 옆에서 재잘대니, 남편의 등짝이 이렇게 작아진 줄도 몰랐다.


“여기 봐봐.” 남편이 내 사진을 찍어줬다. 웃으라고 했는데, 내 표정이 어색했다. 그 어색함까지도, 그냥 우리 같았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창밖을, 남편은 앞만 봤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침묵이 꼭 싫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이 어색함도 우리 나름대로 견디고 있는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딸이 떠난 자리에서 아주 천천히, 우리 둘만의 공기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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