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거리두기
“엄마, 나 워킹홀리데이 가려고.”
딸의 말이 툭 떨어지자, 심장이 같이 툭 내려앉았다.
“호주? 혼자서?”
질문이라기보단 반사적인 거부 반응이었다.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애가… 외국어도 안 되면서 뭘 하겠다고… 위험한데, 사기도 많다는데…. 그리고 목까지 올라온 마지막 한마디. ‘꼭 지금 가야 돼?’ 그 말들을 꿀꺽 삼켰다. 딸의 표정이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내 과거가 떠올랐다. 스무 살 무렵, 나도 집을 떠나고 싶었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말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넌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그 말들에 다시 앉았고, 나는 또다시 ‘엄마의 딸’로 남았다. 그 미룸은 꽤 오래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패턴을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딸은 비행기표를 보여줬다. 진짜였다.
출국 날. 등보다 더 큰 캐리어 두 개, 그 위에 배낭까지 멘 딸이 서 있었다. 나는 괜히 이것저것 챙겼다. 비상약, 여권 복사본, 마스크, 물티슈….
딸이 웃으며 말했다.
“엄마, 이건 거의 이민 가방인데?”
“거기 가서도 하루 두 끼는 꼭 챙겨 먹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게이트 앞. 끝까지 올라오던 말들을 꺼내지 않았다. “조심해”도 “힘들면 바로 와”도 하지 않았다. 대신 딱 한 마디. “이제, 진짜 네 삶을 살아봐.”
딸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불렀다.
딸이 돌아섰고, 말없이 달려와 나를 안았다. 그 체온이 아직 품에 남은 것 같은데— 딸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따라가다, 나는 멈춰 섰다. 손도, 발도, 마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제야, 진짜 깨달았다. 이 아이는 이제, 자기 삶을 향해 간다. 그리고 나는— 이제 진짜 놓아야 한다.
집에 돌아와 딸의 빈방 앞에 섰다. 문은 닫혀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문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며칠 전까지 “좀 치워라” 했던 그 방인데, 지금은 그 흔적 하나라도 사라질까 봐 괜히 마음이 저려왔다. 며칠 뒤, 연락이 왔다. 도착하자마자 월셋집을 구하고, 일식집 알바도 시작했다는 소식. 사진 속 딸은 앞치마를 두르고 접시를 닦고 있었다. 익숙한 손놀림. 표정은, 밝았다. 며칠 뒤엔 친구들이랑 바닷가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 얼굴이, 낯설 만큼 자유로웠다. 나라면, 그 낯선 땅에서 저렇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
딸은 이제 자기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진짜 해방은 누굴 버리고 떠나는 게 아니라—자기 자리를 찾아 나서는 용기라는 걸.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딸의 빈자리에 생긴 공간이 오히려 내 삶을 들여다보게 했다. 기억을 꺼내고, 감정을 쓰고, 말 대신 글로 나를 표현하면서— 나도 조금씩 ‘엄마’가 아닌 ‘나’로 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