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거리두기
간밤에 소란이 지나간 뒤, 집안 공기는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 리모컨을 쥐고 TV를 켰지만,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나는 부엌에서 몰래 그 뒷모습을 훔쳐봤다. 묵묵히 앉아 있는 어깨가 왠지 작아 보였다. 며칠 전, 남편이 딸에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야? 취업 안 하면 집에서 쫓아낼 거야.” 그 말에 화가 치밀었었다. ‘왜 딸을 몰아붙여? 왜 상처를 주는 말을 해?’
하지만 그날 밤, 남편의 혼잣말을 들었다. “회사도 불안하고… 나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순간 알았다. 그건 화가 아니라 불안이었다. 가장으로서 집을 지켜야 한다는 무게가 그의 목소리를 날카롭게 만든 거였다. 남편의 불안에 내가 더 눈치를 보고, 그 눈치가 딸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남편의 불안 → 나의 눈치 → 딸의 침묵→ 남편의 불안. 딸의 침묵이 다시 남편의 불안을 자극하는 루프. 나는 다시 남편을 훔쳐봤다. 그의 손끝이 리모컨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저 사람도 버티느라 목소리를 키우는 거였구나.’ 남편을 ‘적’으로만 봤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날 밤, 작은 용기를 냈다. “나도 요즘 무서워. 딸이 방에만 있으면 나도 불안해져.” 남편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눈빛이 조금은 풀렸다. 그날 우리 둘의 불안이 잠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