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으로 놓고 감정으로 연결되다
나는 종종 “유머 감각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내게 유머는 재주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웃음을 배웠다. 상담학을 공부하고 나서야 알았다.
아버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어머니가 대신 가족의 버팀목이 되었다. 어머니 마저도 일하러 나가면 어린 우리는 방임되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의 주사를 견디고, 그가 벌인 일을 가족이 함께 수습했다. 가족의 모든 에너지가 한 사람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 안에서 생긴 규칙이 있었다. 보지 마라. 느끼지 마라. 말하지 마라. 그건 살아남기 위한 법칙이었다. 그 틈에서 나는 유머를 배웠다. 농담을 섞어 말하면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을 웃길 때마다 묘한 희열이 밀려왔다. 어느 순간, 전능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언젠가 웃기지만 슬픈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한 줄의 웃음 끝에 오래 남는 여운을 남기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나처럼 어린 시절을 버티며 자란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다, 얼마든지 잘 살아낼 수 있다’는 말을.
남편은 철저한 T형 인간이다. 감정보다는 논리, 공감보다는 해결. 가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설 쓰는 소리 하지 마라.” 나는 속으로 웃는다. ‘그래, 당신은 이미 나의 독자 1호야.’ 어쩌면 그는 내 안의 작가를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일지도 모른다.
긴장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농담부터 던진다. 그게 내가 처음 배운 방어기제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농담 뒤에, 내가 말하지 못한 수많은 아픔이 숨어 있었다는 걸. 그래서 이제는, 그 아픔을 웃음으로 풀어내고 싶다. 비웃음이 아닌, 따뜻한 유머로. 상처를 덮는 게 아니라, 그 위에 꽃을 피우는 방식으로. 그게 나의 글쓰기이고, 나의 해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