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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값을 지불하지 않았을 때

감정을 놓고 감정으로 연결되다

by 은혜


우린 또 싸웠다. 말꼬리에서 튄 감정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날카로웠다. 그리고 남편은 어김없이,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갔다. 침묵, 문 닫힘, 눈 피하기. 정확하게, 익숙하게, 예고 없이.


예전 같았으면 나는 불안했을 거다.
‘내가 먼저 말해야 하나…’
‘이러다 영영 틀어지면 어쩌지…’
그 불안을 못 견디고 내가 먼저 웃고, 말 걸고, 밥 차려주고— 감정값을 대신 치렀다.


그런데 이번엔— 하지 않았다. 대신 원고를 쓰고, 강연안을 다듬고, 카페에 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기분이 무거우면서도 가벼웠다.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구나.’

남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틀, 사흘. 나는 기다리지도, 계산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저녁, 남편이 부엌에 들어왔다. 싱크대 앞에서 물을 마시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물회나 먹으러 갈까.”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약간 조심스러운 눈빛. 그 한마디가 30년 익숙했던 패턴을 깨고 남편이 스스로 동굴에서 걸어 나온 최초의 장면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지갑을 챙기고, 신발을 신었다.

그날 저녁, 물회의 새콤한 국물이 오랜 침묵을 조금 녹여주었다.

‘이 사람이 지금, 미안하다고 말하는 중이구나.’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조용히 깨달았다. 상대의 변화를 기다리기보다 내 감정을 먼저 존중했을 때, 비로소 공기가 바뀐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지켰을 뿐이다. 그러자, 서로를 감싸던 공기가 달라졌다. 말 한마디 없이, 그는 동굴에서 나왔다. 말 한마디 없이, 나는 나로서 살았다. 누가 이기고 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나를 잃지 않겠다는 단순하고 단단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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