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놓고 감정으로 연결되다
돌이켜보면, 나는 늘 엄마를 바꾸고 싶어 했다. “왜 내 마음을 몰라?” “왜 감정을 안 보여?” 엄마는 늘 묵묵했고, 나는 늘 답답했다. 동굴 속에 숨어버린 남편이 나오길 바라던 것처럼, 엄마도 언젠가는 마음의 문을 열어주길 바랐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뜻밖의 말을 꺼내셨다. “나… 동네 복지관에서 한글 학교 다녀.” 순간, 귀를 의심했다. 평생 글을 몰라 도장만 찍던 엄마가, 칠십이 넘은 나이에 학교를 다닌다니. “힘들 텐데, 왜?” 내가 묻자, 엄마는 잠시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나, 편지 쓰고 싶어.”
그 한마디가 내 마음 깊숙이 내려앉았다. 엄마가 내게 편지를 쓰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평생 마음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공책을 가방에 넣고 복지관으로 향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 집안에도, 이제 말문이 트이는구나.’ 그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며칠 후, 엄마가 조용히 덧붙였다. “우리 애들 군대에 있을 때, 다른 엄마들은 다 편지를 보냈는데 나는 글을 몰라서 편지를 못 썼다. 그게 참 마음이 아팠다. 글을 알았다면, 내 아들한테편지 한 장은 남길 수 있었을 텐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의 마음속에 쌓였던 세월이 전해졌다. 배우지 못해 스스로를 묶어둔 세월. 언젠가는 글을 배워 사랑을 한 장의 편지로라도 남기고 싶었던 마음. 엄마의 그 말은 나에게도 울림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의 글자’라는 단어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건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평생 마음을 말하지 못했던 여자의 첫 언어였다. 엄마가 글자를 배우는 순간, 우리 집안의 오래된 침묵에도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 균열은 나를 통해, 내 딸에게로 이어졌다. 내가 엄마의 딸로서, 그리고 내 딸의 엄마로서, 대물림되던 감정의 고리를 처음으로 끊어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