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이 살던 집에 고작 갓난아이 하나 들어왔을 뿐인데, 그 하나의 존재로 인해 삶이 언제 지루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생활의 연속이 시작된다.
야근은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에, 근무시간 동안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남자는 일만 한다. 허둥지둥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보면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퇴근 30분 전쯤 아내에게 문자가 온다.
'오빠, 언제 와?'
'응, 정시퇴근하고 후딱 갈게!'
아이와 하루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남편이 1초라도 빨리 집으로 와주길 바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그냥 알아서 정시퇴근 할 건데 그걸 굳이 물어보는 의도에 불쾌감을 느낀다.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으로 달려 나간다. 규정속도와 신호를 아슬아슬하게 준수하며 집 현관문을 여는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25분이다. 여기에서 5분이라도 늦으면 아내로부터 왜 이렇게 늦게 오냐는 소리가 들리기에 반드시 퇴근시간을 준수한다. 씻고 평상복으로 환복하고 새 밥을 안친 후 아이와 30분 정도 논다. 그리고 집 정리를 시작한다.
현관 입구부터 안방까지 들어오면서 미리 계산해 둔 루트대로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한 후, 진공청소기와 물걸레청소기를 돌린다. 이유식을 시작한 덕복이를 위한 요리 하나, 배고픔에 절어있을 아내를 위한 요리 하나를 내어주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19시까지 저녁식사와 간단한 정리는 끝난다. 식기세척기를 돌린 후,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건조기에 들어 있는 마른 옷들을 꺼낸다. 빨래를 정리하고 나면 아기 목욕 시간이다.
덕복이는 이제 좀 컸다고 물놀이도 즐긴다. 목욕놀이하고, 머리 말리고, 바디로션과 각종 연고도 바르고, 새 옷과 새 기저귀로 갈아입힌다. 이것저것 하려 하고 자꾸 움직이는 아이를 다뤄야 하므로 족히 한 시간은 걸린다. 야심 차게 도전한 서양식 분리수면은 대 실패로 끝났기에, 동화책 5권 읽기 수면의식이 끝나면 엄마와 아기는 자러 들어간다. 20시 30분 대면 육아 종료.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일초라도 낭비하는 시간이 없어야 한다. 우선, 기저귀 쓰레기통을 포함한 집 안 곳곳의 쓰레기통을 비우고, 다용도실에 적치되어 있는 재활용품과 음식물쓰레기봉투를 재빠르게 챙겨 분리수거를 실시한다. 남자는 매일 나오는 어마어마한 쓰레기의 양을 보며 육아 가정마다 이 정도의 쓰레기가 나오면 환경오염이 매우 심각한 것이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을 품는다. 좀 전에 돌린 세탁기에서 빨래가 다 되었다는 알림음이 오면 이들을 건조기로 이동시켜 건조한다. 세척이 완료된 식기를 정리하고, 아기 식기는 따로 모아 살균 건조기에 넣는다. 다음날 조중식에 아기가 먹을 이유식 재료들을 찜기에 들어가기 좋게 손질하고, 찜기를 돌린다. 22시가 되었다. 찜기의 식재료가 익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60분. 퇴근 후 약 6시간 만에 남자에게 자유시간이 찾아온다.
이미 컴퓨터는 켜두었다. 남자는 초초하게 게임 실행 버튼을 누른다. 로딩시간만 족히 2-3분은 걸리는데 남자가 느끼기에는 영겁의 시간이다. 남자가 좋아하는 게임은 배틀그라운드라는 FPS(First-Person Shooter, 1인칭 슈팅) 게임이다. 쉽게 말해 총 들고 싸우는 놀이이다. 장교 사격 교관 출신답게 그는 줄곧 총 관련 게임만 해왔다. 실력도 매우 좋은 편이다. 한 번 플레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30분.
'이유식 재료가 준비될 때까지 2판 정도 할 수 있겠군.'
남자는 게임 시작 버튼을 눌러 전장으로 향한다. 다가오는 적의 발소리를 듣고, 적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고, 멀리 있는 적을 일발에 사살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한 판에 100명이 참가하고 4인 팀을 이루어 총 25팀이 승부를 겨루는 대형 전장이기에 전우들과의 소통은 필수이다. 남자는 헤드셋 마이크를 사용해 군시절 소대원들을 이끌던 경험으로 지휘를 하기 시작한다.
"1번 님, 남쪽 경계해 주시고요, 2번은 나랑 같이 앞 건물에 정찰 갑니다. 4번은 높은 곳에서 엄호 좀 부탁해요."
게임에는 레벨이 있다. 하수, 중수, 고수 등의 레벨이 있다면 남자의 계급은 고수에 속하는 그랜드마스터이다. 실제 군에서의 리더 경험도 더해져 팀전에서는 지는 날보다 이기는 날이 많았기에 남자는 게임 안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다. 자신은 특별하지 않고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사회의 한 부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남자가 타인으로부터 추앙받는 그곳은 남자에게 엄청난 도파민을 제공했으리라. 계획된 60분은 이미 지났고, 남자는 여전히 전장을 누빈다. 게임을 시작 한지 3시간 정도 지난 새벽 1시 즈음, 서재 목적으로 꾸몄으나 현재는 아기 용품 창고가 되어버린 공간의 한쪽 구석에서 영웅놀이를 하던 남자는, 아기를 재우고 탈출에 성공한 아내에게 발각된다.
"아, 자기 깼어? (나 게임 좀 더하게) 그냥 아기랑 푹 자지 그랬어. 찜기 돌려놓고 기다리면서 진짜 잠깐 한 판 하고 있었어. 이제 나가서 이유식 큐브 만들어야겠다. 자기 야식 먹을래?"
남자는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황급히 말한다.
"오빠, 퇴근하고 하루종일 고생했네. 그래, '나는 솔로' 보면서 뭐 좀 먹을까?"
"응, 냉장고에 돼지고기 사놓은 거 있는데 그걸로 김치찜 만들어줄게. 같이 맥주 한잔 하지 뭐."
남자가 3시간 동안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플레이한 게임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해 체력과 건강을 다 해치는 그 게임은, 그에게는 피난처이다.
'아내는 육아에 지쳐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깨끗해진 집에서, 새벽 1시까지 아이가 먹을 이유식을 준비하는 자상한 남편과 예능 프로그램을 즐기며, 맥주 한 캔과 안주 하나에 주린 배와 마음을 따뜻하게 채울 것이다. 내가 그녀의 피난처다.'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주방으로 가 앞치마를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