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 5일
덕복이는 산소포화도가 떨어져서 대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해당 기간 동안 아내를 보필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기에게는 유축한 모유를 가져다주고, 여분 기저귀와 물티슈를 사다 주는 것이 전부였다. 매일 면회를 했고, 그때마다 우는 아내를 달랬다. 아이가 건강하게만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가 통했는지 5일 만에 퇴원했다.
6일 ~ 20일
덕복이를 데리고 집 근처 산후조리원으로 들어갔다.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아이에게 젖물리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근처에서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영상에 담을 뿐이었다. 속싸개, 겉싸개 하는 법,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도록 안아주는 법, 기도 막히지 않게 눕히는 법, 수유 후 트림시키는 법, 기저귀 갈아주는 법, 씻기는 법 등등 한 번에 기억하지도 못할 육아 노하우를 주입식으로 교육받았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이 작은 아기를 잘못 다루었다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아내는 묵묵히 자신의 과업을 수행했다. 당시는 코로나 상황이어서 아내만 상주할 수 있었기에, 나는 퇴근하자마자 조리원을 찾아가 아내와 덕복이를 돌보았다.
우리는 매일 덕복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겼다.
21일 ~ 50일
덕복이가 집으로 왔다. 집에서의 첫날밤은 무척이나 긴장되었고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두 존재가 살던 공간에 한 존재가 추가되었다. 이제 이 공간에서의 한 가족이란 3인을 의미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아내는 아기를 위해 모유수유를 선택했고, 3-4시간마다 수유를 했다. 그때마다 나도 깨어 아내 옆에서 수유쿠션 준비, 손수건 가져다주기, 트림시키기 등 각종 잡무를 수행했다. 수유는 아내가 하는 데 왜 나는 같이 깨어 있어야 하는 걸까, 잠을 자지 않고 나도 깨어 아내 곁을 지키는 일이 과연 효율적인 일일까, 육아라는 장기 레이스에서 모두가 피곤해지는 선택은 나중이 더 힘들어질 뿐인데, 한 사람이라도 잠을 편하게 자야 다음날 육아에 그나마 더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념을 마음속에만 품은 채, 배부른 아기의 등을 쓰다듬으며 트림을 시켰다. 그때는 내가 출근한 시간에 장모님이 도움을 주시고 계셨고 나 또한 체력이 있었기에,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장모님의 한 달 찬스가 끝났다. 나는 출근을 해야 했기에 아내가 거의 전적으로 아기를 돌봐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퇴근을 하면 보이는 풍경은 엉망이 된 집과,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와, 소파에 녹초가 되어 누워있는 아내였다. (이 전 두 직장의 근무 환경이 지옥과도 같았기에) 현재 내 직장의 업무 환경이 그리 빡빡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8시간을 일하고 나면 집에서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부터 일었다. 하지만 퇴근 후 풍경은 나를 또 다른 일터로 몰았고 나는 묵묵히 과업을 수행했다. 아기를 씻기고, 아내의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빨래와 설거지를 하고, 매일 나오는 막대한 양의 똥기저귀들을 처리했다.
하루에 4시간 이상 통으로 자본 적이 얼마나 될까. 모든 일이 힘들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행복했다.
51일 ~ 100일
덕복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누워서만 세상을 바라보던 아기는 엎드려서 고개를 가누며 세상을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옹알이는 점점 커졌고 똥도 많이 쌌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기와 철저한 대비를 이루며 우리는 날마다 수척해져 갔다.
새벽에 밥 달라고 깨어나 울고 있는 아기를 달래며, 우리는 80일까지 건강하게 잘 자라준 덕복이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미래 의료기술이 발달해 80일이 아니라 8만 일까지 살기를 기원하며, 우리가 죽으면 자식이 슬퍼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자식보다는 빨리 죽어야지 않겠냐,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등의 말을 비몽사몽 주고받으며 밤을 보냈다.
위기는 한 번 정도 찾아왔다. 잦은 수유도, 하루 평균 20개씩 갈아대는 기저귀도, 부족한 수면 시간도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아기가 집으로 온 이후 집 밖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그녀의 탈출 욕구였다. 또 우리만 이렇게 예쁜 아기를 감상하기에는 아기가 너무 예뻤다. 나는 덕복이를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분명 육아 관련 책을 읽었다. 신생아 100일 전 외출 금지도 알고 있었다. 욕구가 이성을 지배한 이상, 금기는 깨지기 마련이었다.
아기가 태어난 지 82일째 되는 어느 화창한 여름날, 우리 부부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채 첫 외출을 감행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해와 하늘과 구름과 주변의 다채로운 색깔의 풍경을 바라보는 아기의 눈에 비친 우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아내가) 신이 나서 산책로를 날아다녔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유정이를 바라보며 너무 아기라고, 너무 귀엽다고 말하는 소리를 지나가는 귀로 듣자니 우리가 이렇게 예쁜 아기를 소유했다는 생각에 이상한 뿌듯함이 생겼다. 그렇게 행복한 산책을 하던 찰나, 지나가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아이를 보더니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아유, 이렇게 갓난아이는 해 보면 안 되는데, 선크림이라도 바른 거예요? 살도 다 드러나서 피부 상해요."
"아, 네. 하하."
내가 어색하게 답하고 아주머니는 지나가셨다.
우리의 행복이란 호수에 걱정이 잔잔하게 파문을 일으키더니 거대한 파도가 되어 일렁거렸다. 약속이나 한 듯 우리는 집으로 방향을 틀어 돌아갔고, 그제야 육아 관련 책에서 100일 전 외출을 하면 아직 면역체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아이에게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글을 본 기억이 사진처럼 떠올랐다. 아기는 아니나 다를까 피부에 붉은 반점들이 올라왔고, 연고를 발라 치료하는 데만 5일이 걸렸다. 우리 부부가 겪은 (아이에게 잘못을 범한) 큰 사건중 하나였다.
90일째 되는 날 덕복이는 스스로 뒤집기를 성공했다. 100일에는 아직 아기를 보지 못한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을 초대해서 가족 잔치를 열었다. 별 탈 없이 잘 자라주는 덕복이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힘들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아기는 곧 스스로 기고, 서고, 언젠가는 방구석구석을 뛰어다닐 것이었다. 엄마는 항상 아기를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었고, 아빠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주어진 일들을 해 나갈 것이었다.
육아는 (누가 하든지) 힘들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힘들게 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다. 하루종일 애만 보며 집에 있는 사람은 직장에서 퇴근하는 사람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다 내려놓고 싶을 것이고, 하루종일 일만 하다 집에 들어온 사람은 집에 오자마자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다 내려놓고 싶을 것이다. 이 간극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것이 '나만 힘듦'과 '힘들지만 행복함'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