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결혼 20년은 그림자 인생
42세에 늦둥이를 낳았다. 임신했을 때 나이를 생각하라고 이제 낳아서 어쩌려고 그러냐고 친정이든 시댁이든 말할 것도 없이 다들 한마디 하며 축하는 하되 반기지는 않았다.
첫 아이를 낳고 피임도 안 했는데 아이가 10년 만에 생긴 게 여자만의 문제인가? 자기 관리 못 한 여자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첫아이 때 자궁이 열리지 않아 수술로 아이를 낳았기에 늦둥이도 그럴 거라는 의사의 권유로 수술로 아이를 낳았다. 수술 후 3일째 되는 날 겨우 아이를 만날 수 있었다. 아들이었다. 시댁에서 첫아들 손주였다. 시아버지께서 아이를 보시고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며 말씀하셨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 내 아들 뒤에 손주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시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한편 씁쓰름했다. 무엇을 한시름? 딸들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일까? 대를 잇는다는 게 그런 것인가? 손주가 태어난다는 게 그렇게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되었다(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들 얼굴에 시아버지가 겹쳐 보였다. 아! 이 우월한 유전자여).
내 결혼 20년은 그림자 인생
처음부터 우리는 남자는 재혼이고 여자는 변변치 않다는 이유로 양가의 반대에 부딪쳤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고 3년을 시댁에서 살아야 했다. 미움과 원망이 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싫은 것 같았다. 잘해도 이뻐할까 말까 하는데 할 줄 아는 게 없는 며느리니 얼마나 눈엣가시였겠나.시댁에서의 시집살이는 나를 갉아먹었다. 내가 배우고 참고 인내하면 살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무조건적 미움은 어떤 걸 해도 해소되지 않았고 낙담과 좌절만 있었다.
그래서 그림자로 살기로 했다. 아침에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공장에 취직하고 최대한 시댁에서의 시간을 피했다. 서로 얼굴 맞대는 일을 되도록 최소한으로 하려고 할 수 있으면 잔업과 특근을 도맡아 했다. 덕현에게 이렇게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지 하소연하면 “조금만 참자.” “남들도 다 이러고 산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나름대로 덕현도 중간에서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당하는 게 아니니 내 맘의 10분의 1도 헤아리지 못했다. 주변의 친구와 이야기하고 와서는 나에게 “요령이 없어서 더 힘들다.”라고 했다. 내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는데 고작 남의 말이나 전달해 주는 남편이 내 편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장본인이 이렇게 성의 없게 이야기할 줄 미처 몰랐다.
시집살이 3년을 지나 우여곡절 끝에 분가하게 되었다. 분가하고 얼마 지나 임신을 했다. 임신 6개월이 되던 어느 날 시댁에 가게 되었는데 시아버지 왈, “희연아! 이제야 내 며느리 같다.” 나는 당황해서 “네?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되물었다. 시아버지는 나를 잘 챙겨주시고 아껴주는 분이었다. 그런데 임신 6개월인 며느리에게 하는 말씀은 황당 자체였다. 이제야 창녕 조가 씨를 가져서 그럴 것이다. 만약 임신을 못 했다면? 영영 창녕 조가 48대손 며느리는 아니라는 말인 셈이었다.
가부장적 정서가 조상 대대로 시아버지를 거쳐 덕현에게까지 왔다. 덕현도 꼰대에 꽉꽉 막힌 사람이었다. “여자와 접시는 밖으로 내돌리면 안 된다.”라고 했다. 덕현은 가정에 있는 행사가 아닌 집안 13개의 제사를 챙겼던 사람, 집 청소한다고 하면 슬그머니 어딘가 가버리는 사람, 어지르며 돌아다니고 챙기는 건 마누라 손을 거쳐야 하는 사람, 가정에서 본인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못마땅해하는 대한민국 꼰대 아저씨의 표본이었다. 이런 생각이 내 아들에게까지 절대 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 인생 20년은 나로 살 수 없는 세월이었다. 박희연이라는 사람은 없고 아내, 며느리, 엄마만 있었다. 내가 그럼 20년 동안 집에서 놀기만 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남편의 일을 도와 남들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 재택근무를 했다. 남편의 직업은 중고차 딜러, 토탈 웹사이트 제작자, 광고 홍보 담담, DB 관리자 등등, 중고차에 관련된 전반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월급도 없이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남편 뒤에서 그림자로, 집 안에서 밖에서 불평 없이 무조건 묵묵히 하며 20년을 보냈다.
나는 어릴 적 한때 현모양처가 될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어질고 착한 아내이기를 바란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한 현모양처란 한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동등한 관계에서 가정을 현명하게 잘 꾸려가는 관계’라 여겼다. 나는 한마디로 현명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 잘하는 걸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누군가 장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나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내 대답이었다. 지식이 많다는 건 현명하게 생각하고 깨어 있는 사람일 테니까. 배우고 존경하면서 살 수 있고 암묵적으로 정해저 있는 남자 여자 역할만 따라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남편 덕현은 지식이 많은 사람은 맞았다. 무엇을 질문해도 대답이 나왔다. 지금 좋으냐고?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게 아닐까?”라고 답하겠다. 덕현이 지식이 많으니 삶을 지혜롭게 사느냐고? 지식적으로는 물론 그에게 배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생활의 지혜에는 무지한 것 같다. 배움과 생활은 비례하지 않은 것 같다. 가끔 나에게 어떤 이들이 “좋겠어요. 덕현 씨 같은 사람이 남편이라서”라고 말한다. 난 한숨을 쉰다. “일주일도 안 돼서 도망갈걸요?” 나는 속으로 말한다. 친정엄마도 “조 서방 같은 사람 없다”라고 하신다. 남자들 하는 도박, 술, 폭력도 안 하고, 한눈도 안 판다고 말이다.
여보! 당신 발등 찍은 거 맞아
이프 모임에 들어와서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럴수록 많은 고민이 나를 잠식했다. 페미니즘? 내가 사는 현실과 맞지 않거나 모순된 삶이 보여서였다. 이 모임을 처음 연계해 준 사람이 남편 덕현이라서 더 고민이 되었다. 덕현이 나에게 화숙 작가를 소개해 줬을 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내 발등 내가 찍은 게 아닌지 몰라? "라고 농담처럼 이야기했었다. 사람이 변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변하는 데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내가 순종과 인내로 살다가 분노와 개혁의 사람으로 변하면 고통의 주축은 덕현이 될 것이다.
이프모임에서의 이야기는 나에게 생각하는 힘, 목소리의 힘을 주었다. 내가 내 발등을 찍어 그림자로 산 세월이 있었다면 이제는 남편이 자기 발등을 찍었다고 할 때가 온 것 같다. 내게 예전에 없던 용기도 생기고 삶의 지혜도 조금은 더 가지게 되었다. 나만 페미니즘을 하는 게 아니라 덕현과 이프에서 함께 하며 토론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게 바탕이 되어 우리는 더 평등한 관계로 살게 되길 소망한다.
내가 어릴 적 나름대로 꿈꾸었던 현모양처의 삶이 이제는 실현가능하다는 희망이 생긴다. 내가 더 목소리를 갖게 될수록 더 현명해질 테니까. 지금은 온전히 나를 지지해 주는 딸과 그래도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려는 남편과 아직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막둥이 아들이 나의 든든한 뒷배가 되는 것 같다. 지금 나의 가정은 온전한 평등한 관계는 아니지만, 나아질 것이다. 서로가 잘하는 걸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가정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딸과 아들이 가정을 꾸릴 때는 그들도 평등한 관계로 살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