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현 씨 우리 연대하며 살자
우리가 같이 산 세월이 벌써 20년이네.
지나온 날을 뒤돌아보니 갈팡질팡한 일도 많았지만 모든 걸 견디며 살아온 우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 지랄 맞은 성격대로 지금까지 잘 왔다. 처음 결혼해서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땐 일주일도 못살고 당신과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20년이라니, 세월이 정말 유수같이 흘러버렸어. 즐거울 때도 있었고 슬프고 고단할 때도 있었지! 그래, 우리가 돈이 없었지 정이 없었냐? 지랄 맞긴 해도 서로 의지하며 잘 살아온 거 같아.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작년에 나에게 페미니스트 작가를 소개해주었고 올핸 이프와 글쓰기까지 하게 해 줘서 고맙게 생각해. 이프에서 토론하고 글쓰기로 생각을 나눠 보니, 내가 어려운 삶을 잘 헤쳐 나왔더라고. 내가 자랑스러워서 처음으로 내게 칭찬도 했더랬지. 당신도 알다시피 내가 평탄하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잖아? 얼마 전에 당신이 그랬지! “내 가슴에 빈 곳이 채워진 것 같아!” 그 말에 위로가 되었어. 요즘 내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도 그래서겠구나 생각해.
이 마음 고대로 당신에게 돌려주고 싶어.
당신이 버겁게 잡고 있던 것들 말이야 이제는 좀 덜 잡아도 되지 않을까? 권위적인 것 내려놓고 가부장적인 것 내려놓고 조금 가볍게 생각하고 살다 보면 한번 웃을 거 두 번 웃을 수 있고 한번 화낼 것 안 낼 수 있겠지. 그래서 우리가 오래 손잡고 길만 잃지 않고 가면 어느 날 서로 잘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더 들 것 같아.
나는 당신의 가부장적 생각과 의무, 정의가 당신을 버겁게 짓누른 건 아닌가 생각해. 한 가정의 가장의 의무라며 무조건 당신이 주축이 되려 하고, 당신 뜻대로 가야 한다는 게 이기적인 생각 아닐까? 가족은 공동체인데 말이야. 나는 알아! 당신이 얼마나 버거웠는지 힘들었는지 말이야. 당신은 내가 원해서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빠가 되려고 노력했다고 하지만 내가 아는 당신은 그 일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몰랐던 것뿐이었어. 못 해 봤으니깐! 못 받아봤으니깐!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랬잖아. 가부장적이며 권위적이었잖아. 그걸 당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행동과 생각이 부자연스러웠던 거 아닐까? 아들은 자라면서 부모에게 사랑을 갈구하면 안 되나? 당신에게 그 아쉬움이 큰 것 같았어!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은 당신이 먼저 만들어줬지! 장난감도 먼저 사주고 아이들 눈만 보고 좋아하는 거 알아서 해주고. 오죽하면 내가 “아빠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어?”라고 했었지. 당신 아이들에게 잘해줬어. 남편으로서 가장으로 힘들다고 어렵다고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던 모습 말하지 않아도 나는 다 알았지. 사람 때문에 힘들고 일 때문에 힘들고, 돈 때문에 힘들고 이 모든 걸 한꺼번에 이기지 못해 궁지에 몰리기도 했지! 자존심 버리고 의무감 버리고 힘들다고 같이 고민하자고 했으면 당신 혼자 옥상 올라가서 안 좋은 생각하는 일도 덜 했을 것이고 괴로움과 궁지에 몰리는 마음도 덜 했을 거야.
맏아들로 잘하고 싶은 마음 잘 아는데 그렇지 못해서 자꾸 자격지심이 들고 힘들어하는 당신 안쓰럽더라. 시아버지께서 맏이가 잘되어야 한다. 성묘 가서도 우리 장남 잘되게 해 달라고 시할머니 할아버지 묘에서 한탄하시던 말씀 그게 얼마나 부담이었겠어? 번듯한 아들 괜찮은 맏아들 말고 당신이 부모님에게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것만큼 하면 조금은 편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지 않을까? 부모님이 조금 서운해하셔도 조금은 묻어 버리고 살자는 거지. 그런데 그게 어렵지? 그래 알지.
당신이 나가서 마누라 자랑하고 다니는데, 집안에서도 마누라를 귀하게 알아주지, 그건 잘 못 하더라. 처음 둘이 나와 살 때 당신이 밥을 시켜 먹자고 한 게 생각나네! 살림할 줄 모르는 날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 정말 좋았어. 음식을 하려면 막막하던 때라 참 고맙기도 했어.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싸웠었지. 무엇 때문에 싸웠는진 기억이 없는데 당신이 밥 달라고 한 건 기억나. 내가 완전 빡쳤어! 싸워도 밥은 내가 차려줘야 하나? 여자는 싸워도 밥은 차려주면서 싸우는 거라던 어른들 말이 생각나서 더 화가 나더라.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지. 당신도 똑같이 여자를 밥 떼기로 보는구나 싶었어. 그 후에도 눈 뜨고 일어나서 밥 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가끔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고 화딱지가 났지
살면서 당연한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당연한 건 없더라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안 되면 서운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따져 묻기도 해야 하고 그러다 마찰이 생기니 불화가 일어나곤 했지. 그래서 나는 어느 날부터 당연한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그랬더니 다는 아닐지라도 더 이해하게 되고 편안하게 되었어. 당신도 그러길 바라.
혹 당신과 내가 생각이 좀 달라도 연대하면 우리 서로 이해하면서 살 수 있을 거 같아. 밖에서만 연대하지 말고 집 안에서도 우리 연대하면서 삽시다. 아이들과도 그러자. 아직은 이해하며 잘 지내는 편인데 앞으로의 세상은 더 다르게 변할 거잖아. 우리가 아이들을 이해하고 연대해야 왕따 안 당하고 당신과 내가 더 나이 먹어서 외롭지 않게 된다. 명심해!
얼마 전 원태연 시집이 생각나더라고. 고등학생 때 읽은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제목 당신도 알 거야! 지금 우리에게는 반대의 의미로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사랑도 좋지만 숨구멍이 되었으면 해! 당신이 그릴 수 있는 만큼 그려봐. 그만큼 만이라도 서로의 숨구멍이 되어 당신과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 서로의 동그라미 속으로 들어가 쉴 수 있으면 좋겠어.
100세 시대 너무 길다. 아직도 멀었는데 나이가 들면 우리도 사람인데 힘들고 어려울 때 어디로 가야 해? 서로의 동그라미 속에서 숨 쉬고 위로하면서 살면 참 좋겠어. 당신을 만나 지금까지 사는 삶이 기적일지 몰라. 앞으로 계속 기적을 만들면서 살겠지. 우리 잊지 말고 연대하면서 지랄맞게 살아보면 좋을 것 같아.
2024년 9월 10일 당신의 숨구멍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