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감마끼끼 Sep 04. 2024

회상

그렇게... 만났다.

  기차에 올랐다. 아늑한 느낌이다. 자연스레 나오는 한숨 뒤에 나는 손가락이 모자라는 어려운 셈을 해본다. 몇 년만인가…


  나와 그녀는 기차를 탄다. 예약된 우리 좌석 외엔 한 간 모두 거의 텅텅 비어있다. 오늘이 평일인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가 목적지로 하는 곳이 그만큼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할 수도 있겠다. 평화롭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낯가림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이 없을 땐 항상 오롯이 나만의 시간에  평화로움을 부여해 왔었다. 지금도 그랬다. 보는 사람의 눈이 없으므로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목덜미를, 그 숱 많은 올들을 쓸어 올린다. 아하! 그녀의 귀 끝에서 목에 이르는 선에 콩알만한 정말 조그만 깜장점이 하나 있다. 아마 그녀도 이것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유난히 숱이 많은 그녀의 머리칼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래! 이것을 나만의 비밀로 만들자. 그녀 자신조차 모르는 것을 내가 안다는 사실이 매우 흐뭇하고 유쾌하다.

  차창너머 나무들이 줄지어 데려가는 폼이 꼭 오랜 적 우리 집의 나무 울타리 같다. 그 늘어선 담들이 유리창 뒤를 받쳐주므로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두지 않아도 그네를 볼 수 있다. 중학교 시절 거울로 여선생님께 행하던 못된 짓이 생각나 난 혼자 웃어볼 수 있었다. 다시 유리창 속의 그녀를 바라본다. 차창 속 그녀의 시선 또한 나의 얼굴을 보고 있다. 그녀의 시선에 나의 것이 밀린다. 얼굴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이젠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리라.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다. 가르마진 머리칼 사의의 두피가 참 정갈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어 서서히 떠오르는 그녀의 두 눈동자! 내가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수많은 빛깔!


  “아비요!”

  놀이터에 울리는 괴성소리에 아이들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곤 이내 무관심해진다. 다만 이 동네에선 낯선 몇몇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뿐이다.

  “이리 가져와라. 니도”

  “치이! 형아는 딴 데 가 놀아라. 너무 잘한다”

  “히흐, 히흐흐”

  연방 내뿜는 웃음소리가 끝장을 보고 말겠다는 심사다. 근돌이는 아이들의 구슬을 하나씩 주머니에 넣으며 새로운 판을 벌인다.

  “나 갈래”

  “나도 갈련다. 형 혼자 다 해라!”

  “야아! 니들 가면 어떡해, 아, 알았어. 이거 다시 줄게. 한 판만 더하자”

  큼직한 손에 들려있는 구슬과 함께 그의 비굴하지만은 않은 미소가 스쳐간다. 판은 다시 벌어졌고, 이번에도 근돌이는 싱겁게 다시 구슬들을 그의 큰 손에 움켜쥘 수 있었다. 괴성소리가 울렸음은 당연했으리라.


  근돌이는 이젠 걸었다. 무슨 자락인지도 모를 콧노래에 제법 박자도 맞춰보는 폼이란 흡사 발바닥 뜨거운 돼지가 발광하는 것 같다. 항상 지나는 쓰레기장에 다다르자 그는 주섬주섬 바지를 내리고는 쓰레기 리어카 뒤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이 시간이 참 편했다. 그냥 좋기만 했다. 하지만 이 시간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콩알탄 -근돌이는 무엇보다도 이것을 가장 무서워 했다.- 이 서너 발 그의 엉덩이 뒤에 소리 내며 떨어졌고 그는 그대로 일어나 달아났다. 그 뒤로 마치 피라도 흘린 것처럼 황갈색 빛이 점점이 이어졌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라디오에선 근래 들어 가장 무더운 날이라 떠들었던 것이라 기억되는데, 아무튼 그 덕에 나는 쉽게 어머니께 아이스크림 사 먹을 돈을 타낼 수 있었다. 큰 선심을 써서 친구까지 아이스크림을 사준 나는 으쓱거리면서, 연신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에 애처롭게 바람을 불고 있는 친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 역시 아까워 한입 크게 베어 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 모퉁이를 돌아설 때 우리는 그만 근돌이와 마주치고 말았다.

  “야! 니들 무어해? 응, 뭐 먹는구나? 나 좀 줘라.”

  금방이라도 근돌이는 괴성을 지를 것 같았다.

  “이거 내가 먹던 건데..”

  “괜찮다. 그리고 많이도 안 먹는다. 좀 줘.”

   마지못해 우리는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어야 했고 곧이어 구슬을 땄을 때보다 더 만족스러워하는 근돌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알뜰히도 혀로 쭉쭉 핥았고 내 것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한참 후 침에 범벅이 되어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우리에게 건네주고 난 뒤 그가 모퉁이로 사라졌을 때 우리는 동시에 그것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일말의 아까움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러곤 나는 주머니 속의 콩알탄 몇 개를 만지작거렸다.


  성근이는 매일 우리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의 돈을 가지고 다녔고 그리하여 그의 주위엔 아이들이 떠나질 않았다. 나도 처음엔 그에게 시기심 어린 행동을 취해보았으나, 이내 그 패거리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런 성근이를 땡수가 불렀다.

  “야! 너 이리 좀 와봐”

  “.. 저.. 저요?”

  “그래 임마. 빨랑 안 와?”

  그날 이후부턴 예전처럼 그의 주위에 아이들이 모이질 않았고 땡수는 성근이보다 더 많은 돈을 쓸 수가 있었다.


  내가 배근식과 나광수를 알게된 것은 그때쯤이리라. 나의 어린 시절에서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긴 그들이 왜 지금 새삼스레 생각나는 것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