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돈을 매일 빼앗기다 못한 우리 옆 학교의 어느 학생 하나가 자살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동네는 물론 온갖 신문을 떠들썩하게 장식했고 학교 주변 폭력배들의 대대적인 검거를 가져왔다. 중학생들부터 성인들까지 동네에서 소문이 안 좋은 이들에 대한 소문과 목격담이 줄을 이었다. 경찰 조사의 첫 번째 대상으로 땡수가 선택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어 하늘소파-우리 동네 깡패 조직-의 행동 대장이라는 누구, 어느 중학교의 짱이라는 누구누구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난무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친구와 함께 땡수가 경찰들의 손에 이끌려 수갑을 차고 가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가 수갑을 차고 가다 말고 나에게 그의 살쾡이 같은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 돈을 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다음에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냉소적인 미소였다. 내가 야릇한 당혹감에 휩싸여 있을 때 근돌이가 나타났고 곧 아직도 이해 못 할 괴이한 사건이 터졌다.
눈에 핏발이 선 근돌이는 다짜고짜 경찰에 힘없이 이끌려가는 땡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언젠가 다리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와는 사뭇 다른 활극을 벌였다. 먼지가 일었고 경찰이 근돌이를 뜯어말렸을 땐 또다시 근돌이의 눈두덩이가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하지만 땡수의 코에서도 피가 흘렀다.
“너 같은 놈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해!”
땡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고 근돌이는 멀어져 가는 땡수를 향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근돌이는 전과는 다른 행동을 했다. 더 이상 구슬치기도 하지 않았고 혼자 넋 놓고 걸어 다니는 것도 보지 못했다. 26세의 몸뚱아리는 밤마다 그를 설치게 만들었다. 그는 그의 누나의 속옷을 쥐고서야 겨우 잠을 이뤘고 어떨 땐 남의 집 빨랫줄에 걸린 빨랫감들을 한참이나 만지고 나서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이어 얌전하기로 소문난 가겟집 박 씨 아저씨의 첫째 딸이 근돌이의 새로운 놀잇감이 되었다. 근돌이는 밤이면 창너머 상희 -박 씨 아저씨의 첫째 딸- 누나의 여체를 보고 혼자 헐떡거리곤 했고 전보다 잠을 더 설쳤다.
그러던 어느 날 기어코 일은 발생했다. 공장 갔다 돌아오던 상희누나의 길목을 근돌이가 막아선
것이다.
“상희야. 니 이리 좀 와봐라.”
“왜 그러세요…”
“히흐. 히흐흐..”
상희누나는 몇 발 뒷걸음을 쳤다. 근돌이는 광기 어린 눈으로 연방 탐욕스러운 웃음을 웃고 있었다. 이어 상희누나는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고 근돌이는 짐승처럼 그 뒤를 쫓았다. 근돌이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팔을 약간만 뻗쳐도 상희누나를 잡을 수 있으련만 그는 그대로 달리기만 했다. 어느덧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던 일을 잊은 채 뛰는 것 자체에, 자신과 같이 뛰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이들과 축구를 하느라 밤늦게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내가 그 광경을 봤을 땐 이미 상희누나가 지칠 대로 지쳐서 더 이상 그와 같이 뛸 수가 없었고 근돌이도 서서히 그가 하려던 짓을 기억해내고 있을 때쯤이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곤 잡히는 데로 콩알탄을 던졌다. 폭약소리와 함께 상희누나의 비명소리가 퍼졌고 근돌이는 귀를 감싸며 달아났다.
“휴우…”
나는 근돌이를 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깨어난다. 이내 갈증을 느끼는 듯한 그녀의 입술을 보았다. 메말라있다. 마침 기차내 판매원이 지나간다. 나는 음료수를 하나 샀다. 왜 하나만 샀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웃어 보이며 그것을 내밀었다. 그녀는 입을 적신 후 다시 나에게 되돌려준다. 그녀의 입술이 젖어있다. 촉촉하다. 음료수를 내 입술에 가져갈 때 그녀의 향기를 느낀다. 향기 속에 어린 붉은빛의 따듯함. 나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본다. 빨갔다. 고추잠자리가 창밖에 얼핏 보였다.
근돌이의 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그는 그보다 3살 많은 그의 누이와 함께 살았고 누이는 술집작부였다. 하지만 여느 작부처럼 술만 팔지는 않았다. 그녀는 동네 아줌마들에겐 암적인 존재였다. 앞집 아저씨가 새벽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던 날 기어코 동네 아줌마들은 근돌이네 집으로 무리 지어 몰려갔고 속옷 차림의 앞집 아저씨가 재빨리 뒷담으로 뛰어넘어가는 것이 보이는가 싶더니 근돌이의 누이는 머리카락을 휘어 잡힌 채 아줌마들에 의해 길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이어 듣기 거북한 욕설들과 함께 무수한 발길질이 그녀의 몸에 퍼부어졌다. 왁자지껄한 소란스러움에 잠을 깬 근돌이가 호기심에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그의 누이가 온몸을 피로 물들인 채 길바닥에 쓰러져 흐느끼고 있던 때였다. 근돌이의 얼굴에 있던 호기심 어린 미소는 삽시간에 사라졌다. 괴성을 질렀다. 이내 짐승처럼 동네로 뛰어들어갔다. 이젠 콩알탄 마저 무섭지 않으리라. 한참 뒤 근돌이가 돌아왔을 때 그의 누이는 온데간데없었고 방안에 있던 한 장의 쪽지만을 볼 수 있었다. 다음날 근돌이는 전날밤에 그가 행했던 복수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 후 애걸복걸한 끝에 마을에 남을 수 있었다. 그 뒤 마을은 잠잠했고 근돌이 누이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