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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마끼끼 Sep 06. 2024

근돌이와 땡수

그렇게...들었다.

  차창너머 풍경이 단조롭다고 여길 때 나는 그녀의 손을 느꼈다. 다시 한번 그녀의 손 위에 나의 손을 포갤 때 나는 그녀의 눈동자의 색깔을 보았다. 보라색이다! 낯설지가 않은 연보라이다! 그녀의 뺨에도 보라색이 어린다. 흐뭇하다. 내가 만든 색깔이고 나만이 볼 수 있는 색깔이다. 그녀도 내 눈에서 보라색을 봤으면… 기차가 앞으로 가야 할길 은 우리가 왔던 길보다 더 길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더 많은 색깔을 찾아내리라.


  나도 땡수를 알게 되었고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내가 전에 쓰던 돈의 일부만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땡수는 이제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의 억센 팔에 맞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소주 두어 병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그의 집에 들어갔고 자정 무렵엔 그의 아버지의 게걸스러운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 저기 또 땡수다. 어떡해. 나 돈도 없는데…”

   “나도야. 우리 도망칠래?”

   “뭐! 그러다가 땡수한테 걸리면?”

   “……”


  어느덧 땡수는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왔고 언제나 똑같은 그의 어투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야! 니들 땡전 있지?”

  땡수-땡전을 하도 밝힌다 해서 얻은 그의 별명-는 언제나 우리들에겐 두려움의 존재였고, 동네 패거리들 사이엔 끈질긴 독종으로 통했다. 어른들조차 돈으로 그를 회유하는 것이 현명하다 판단했다. 이제 동네에서 땡수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인 어느 날이었다. 근돌이는 한참이나 마냥 걷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리를 건너 이미 마을이 보이질 않을 때쯤 그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심한 잠자리가 그의 시야에 얼핏 비쳤다. 그의 시선은 점차 잠자리의 뒤꽁무니에 모인다. 빨갔다! 아! 바로 고추잠자리다. 어릴 적 그의 누이동생의 빨갔던 입술을 기억해 낸다. 아! 누이의 모습이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뛰었다. 그 입을 만져볼 양으로 그는 손을 뻗쳤다. 하지만 잠자리는 멀리 날아갔다. 그가 더 이상 그것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의 눈에서 찔끔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다시 다리를 건너오는 길에 근돌이는 땡수와 만났다.

  “야! 니 나랑 놀자.”

  “꺼져! 이 자식아.”

  “어? 니 나한테 반말이냐? 이리 좀 와봐.”

  다리 위에선 때아닌 주먹싸움이 벌어졌고 이내 싱겁게 근돌이는 눈을 감싸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야! 니 그렇게 씨게 때리면 어떡해?”

  “훗”

  땡수는 이렇게 어색한 기분이 처음이다. 아파서 찡그리는 근돌이의 얼굴을 보니 이젠 왠지 미안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야. 일어나. 내가 만두 사줄게.”

  “증말! 야 알았다. 빨리 가자.”

  근돌이는 눈의 아픔도 잊은 채 내닫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가는 땡수는 한번 미소를 지었을 따름이다. 땡수가 남을 위해 그의 돈-어차피 뺏은 돈이지만-을 써본 적은 아버지 외엔 처음이었다.


  잠깐 역에 멈춘다. 몇 사람이 우리 칸에 오른다. 나는 심히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그녀와 나의 모습을 그들이 볼 것이란 생각에 흐뭇해진다. 나의 어깨에 살포시 기댄 그녀의 모습은 누구도 형언할 수 없으리라. 참 한가로운 날의 오후다. 이 한가로움이 예전의 나에겐 대단한 고통이었음을 생각해 본다. 기쁘다. 신기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나의 것이 변화한다는 사실에 유쾌하기까지 하다.


  아쉽던 여름 방학은 끝이 났다. 전과 달라진 점이라곤 학교 앞에 아주 재밌는 놀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뽑기- 우리는 이것을 달고나라 불렀다 동네마다 명칭을 달리 했다.-가 그것이었는데 언제나 우리는 학교가 파하면 누구에게 뒤질세라 그곳으로 줄달음쳤고 4학년이었던 나는 나보다 수업이 없던 저학년 아이들로 인해 내 차례가 멀었음을 깨닫고 아쉬움을 금치 못하곤 했다. 그날도 나는 많은 시간을 소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그 달콤한 냄새는 코를 즐겁게 했고 아이들이 모양대로 뜯는 것을 보는 것은 대단한 요깃거리였다. 더욱이 그들이 결국 그들의 임무(?)를 완수해 내지 못했을 때는 묘한 쾌감까지 느끼곤 했다.

  “옛다. 내 일부로 이번엔 꾹 눌러줬다. 잘 뜯어봐라.”

  “와! 기억자아냐.”

  그래 기억자였다. 별이나 로켓모양의 것은 정말 뜯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정말로 뜯기 쉽게 꾹 눌러져 있었다. 나는 이름표에서 옷핀을 뽑았다. 그리고 핀 끝에 침을 발라가며 정성스럽게 기억자를 긁어내고 있었다.

  “야! 그것 좀 줘봐라.”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형. 안돼! 대신 이거 뜯고 나머진 형 다 줄게. 응?”

  “이리 좀 주라니까. 내가 잘 뜯어낼게.”

  근돌이의 눈에 핏기가 어린다.

  “아우…안 되는데…”

  결국 내 달고나는 근돌이의 그 우왁스럽고 시꺼먼 손에 넘어갔고 다시 내 손에 그것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가운데가 반동강난 기억자 모양의 뽑기였다.


  작은 숨소리가 들린다. 덜컹거리는 기차소리의 그 중간 중간, 소리 없는 순간에 꼭 맞춰 들리는 숨소리다. 그녀가 자고 있다. 숨소리를 음미해 본다. 보드라운 느낌이다. 아쉽다. 이젠 그녀의 눈꺼풀로 인해 가려진 눈동자에서 더 이상의 색깔을 찾아낼 수가 없다. 그래도 괜찮다. 그네의 체온이 나를 포근하게 해 준다. 그녀는 내 어깨가 참 편한가 보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다. 길이 끊기지 않고 한없이 이어졌더라면… 그래 정말 이 길은 길다. 그러나 언젠가 끊길 이 길의 종착역을 생각하니 불안하다. 남아있는 시간을 위해 이젠 곤히 잠든 그녀를 깨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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