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과 미국 직원가족들의
저녁식사 행사가 끝나고
새로운 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사모에게 득달같이 전화가 올 거라
예상했는데
조용하네?
분명 그날 저녁식사에 대해
이러저러한 후기로
신나게 떠들 양반인데 말이다.
주말을 앞두기까지 조용하자
이상타 싶어 내가 전활 걸었다.
그런데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심상치가 않았다.
평소보다 다운되어 있고
말수도 적은.
"사모님,
오늘 컨디션 안 좋으신가 봐요"
불면증이 좀 있던 분이라
못 주무셨구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 뭣 좀 물어보자.
그날 식사자리 어땠어?"
"음... 전 그냥... 좋았는데요..?"
그 짧은 식사 시간 동안
별 꼴을 다 본 덕에
온갖 생각과 감정이 들었지만
그것들을
다짜고짜 쏟아낼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사모와 아무리 친해졌어도
그녀는 윗사람이니까.
그날의 행사를 마련한 건
사장님이었으니
최 측근이자 같은 임원인
상무와 사모에게도
다 덮어두고 좋았다,
감사했다는 말을 흘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데
내 대답을 듣자마자 하는 말.
"넌 그게 좋았니?
네 눈엔 그게 좋아 보였어?"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아니,
왜 다들
얌전히 자리 지키지 못하고
다 건너와서는
시장판을 만드냐고!
거기 부사장님이 다 보고 있는 거
몰라?!
왜들 그렇게
체면 차릴 자린지 아닌지
구별도 못하고
몰려다니냔 말이야!
내가 그 앞에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부사장님이
이제 미국에 있는 주재원들을
뭐라고 생각하겠어?! "
아.. 역시 이거였구나...
사장님께서 마련한 식사자리에서
J와 S 그리고
박 디렉터의 부인이 보여준
환장의 콜라보로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리고 싶었던 사람은
나뿐이 아니었던 거다.
다행히 나는
존재도 알지 못하는
일개 사원의 부인으로서
입 닫고 제일 끝자리에 앉아있었다만
사모는
직급의 위치로 보나
앉은자리의 위치로 보나
식은땀 흐르는 그 무언의 압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던 거지.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전화도 안 하려고 했어.
근데 너가 이렇게 먼저 전활 걸어서
얘길 꺼내니까 내가 묻는 거야.
도대체 왜 자리에 안 있고
몰려든 거야?"
사모는 잔뜩 화가 나 있었고
그 모든 화는 똘똘 뭉쳐
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그날 모여든 사람 중
1인이라는 이유로,
그날 이후 통화하는
첫 타자라는 이유로 말이다.
욕받이가 되고 있음에
억울함도 있었고
당혹스러움도 있었지만
왜 나한테 그러시느냐
따질 수 없었다.
당시 사모는
화근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따질 상태가 아닌 듯 보였고
그렇게 흥분한 사람에게
뭐라 말해 봤자
내 손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내 입장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라도
사모를
대화할 수준으로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사모 본인이
그날 얼마나 난처했는지를
일단은 닥치고 듣기만 하면서
네네 대답만 했더니
돌아갔던 눈이
슬슬 제자리로 돌아왔는지
아까와는 다른 톤으로
내게 다시 물었다.
"근데 정말 왜 내 자리로 온 거야?
가만 앉아 있지 않고??"
"사장님이 저희 옆자리에 계셨는데
디저트까지 다 먹고 나니까
남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저희 쪽 테이블로 오더라고요.
상무님도 건너오셨던 거 아세요?"
(당신 남편도 옮겨 다녔다! 아느냐!)
"어, 봤어"
"점점 거의 다 모이더니
회사 얘기, 일 얘기를 하는데
거기에 제가 덩그러니 있는 게
분위기 파악 못하고 껴 있는 건가
싶더라고요.
자릴 비켜줘야 하나? 어쩌지?
하면서 사모님 쪽을 봤는데
거기엔 또 여자들이 다 모여 있길래
갔던 거였어요.
사실,
여자들 다 모였는데 저만 안 가면
그것도 좀
이상하게 볼 거 같기도 했고..."
"아.. 그래 마저.
넌 내가 뒤 돌아볼 때마다
거기 계속 앉아 있더라."
그 말을 들으니
알고 있으면서 괜히
나한테 화풀이했던 거구나 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 내 말이
귓구멍에 들어갈 때가 됐구나 했다.
"간 김에
부사장님께 인사도 드리고
잠깐 앉았다 와야겠다
하고 간 건데
그 여자들이 와서
그 난리를 피울진 몰랐죠 정말"
그러면서
다들 뻘쭘히 있는 상황에
왜 J는
눈치 없이 푼수짓을 시작한 건지,
박 디렉터 부인은
자리가 없으면 서 있던가 할 것이지
다른 여자자리도 아니고
어떻게 사모의자에
엉덩이를 들이밀 수가 있는 건지,
얌전한 줄 알았던 S는
느닷없이 자기 딸 얘기에
5조 5천억을 떠들어 대면서
양손까지 펼쳐 흔들어 보이는 건지,
내가 얼마나 창피했고, 부끄러웠고
증발하고 싶었는지
가감 없이
하고 싶은 얘길 모두 했다.
이렇게
누가 어떤 무례를
얼마나 어떻게 했는지
조목조목 짚어 복습을 시켜줘야
통화 시작 때
나에게 다짜고짜 쏟아낸 화살이
잘 못 배달되었음을
확실하게
인지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역시
내 의도대로 대화는 흘러갔고
오히려 건너갈 수밖에 없었던
나의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했으며
그 상황이
창피했고 부끄러웠던 이가
본인만이 아니었음에
동질감을 느끼고
함께
잘못된 거 맞다 해주는 맞장구에
위로를 받는 듯했다.
거기에 하나 더.
식사 시간에 내 쪽 테이블에 있었던
와이파이 사건을
이야기해 줬다.
염차장과 S의 딸들이
사장님 앞에서 와이파이 때문에
염차장에게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렸던 일.
그래서
보다 못해 사장님이
본인의 포켓 와이파이를
쓰라고 줬던 일.
그걸 보고
아닙니다 거절하거나
아이를 자제시키기는커녕
웃고만 있었던 일 말이다.
사모 반응?
어머어머 소리만 하고
말을 못 하던데?!
이 역시
내 눈에만 잘 못 되었다 보이는 건
아니었던 거지.
"아니,
그 가족은 왜 하필 또
저희 앞에 앉은 걸까요?!"
"아~그거~~
박디렉터가 자리 짠 거야.
사실
원래 우리가
사장님 맞은편 자리였어.
근데 내가 부사장님 쪽으로
자리 바꾸자 한 거야.
우린
사장님이랑 매 번 보는 사인데
뭘 또 그 앞에 앉아~
직원들 보러 오신 거니까
우리가 빠지자고 했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하....!
사실
자리 위치가
내 눈엔 조금 이상했더랬다.
사장과 부사장이
테이블을 따로 나눠 앉는 건
맞다고 봤다.
테이블이 하나가 아닌데
같이 앉는 다면
부사장도 까마득히 높은 분인데
사장의 그늘에 서게 되기 때문에
의전으로도 맞지 않는 것이고
높은 양반들을
한쪽 테이블에 모아놓게 되면
다 함께 어울리자는 의미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니
둘을 나눠 균형을 맞추는 거지.
문제는 그다음 직급들이다.
직급이 높은 임원 혹은
실세인 임원이
어느 쪽에 앉느냐에 따라
사장 쪽 테이블이 힘을 받을지
부사장 쪽 테이블이 힘을 받을지가
눈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사장과 부사장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은 이 상황에서
자리 배정이라는 건
그 둘의
힘겨루기가 될 수도 있는
예민한 문제다.
물론 이런 심리는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법이니
대부분 무심해 보였으나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으로
눈칫밥을 먹던 내 눈에는
너무 잘 보이더라.
내 생각에
상무는 사장님과 함께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장의 직속 라인이고
팀으로 따져도
둘은 같은 전략팀이며
상무는
미국에 파견된 직원들의 우두머리로서
대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직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한 사장과
마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무와 사모는
북미 사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부서도 다른
재무팀의 부사장과 함께 앉았고
그 모습이 내 눈엔 옥에 티였다.
"사실은 자리 때문에
사장님이 우리한테 삐졌었어"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은
당연히 내 앞에 있을 줄 알았던
상무가
눈엣 가시인 부사장 앞에 앉았으니
베프에게 배신을 맞은 것처럼
느꼈던 것.
그리고 부사장님은
전무를 제치고 실세였던,
사장 바라기라고 소문난 상무가
자신의 앞에 앉자
어깨가 으쓱이었던 것.
하지만 사모에게는
그러길래 왜 자릴 바꾸셨냐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가 무슨 상관이냐
편들어 말해 줬더랬지.
왜냐.
사모의 의도가 뭐였는지
내가 백 프로 천 프로 알기 때문이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밥을 주지 않는 심리랄까.
사장은 이미 상무 편이다 못해
자신을 위해서 이젠
상무가 없으면 안 되는 입장이다.
즉,
상무가
더 이상의 정성을 쏟아야 하는 상대는
아니라는 말씀.
하지만 부사장은 다르다.
모든 사업의
돈줄을 쥐고 있는 재무팀이고
심지어 재무 통으로 불려
오너 패밀리의 입김으로
부사장의 자리에 앉은 인물이니
그에게 열과 성을 보인다면
저 높은 곳
그사세에 있는 양반들에게
좋은 이야기가 흘러 들어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안 그래도
회사 내에 적이 많은 상무인데
이걸 놓칠 우리의 사모가 아니지.
그리고
그 속셈을 모를 내가 아니고.
근데 뭐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내 남편이
그런 정치질을 해야 할
위치도 아니고
지금 당장 급한 건
내가 욕받이로 사모의 그 화를
다 뒤집어쓸 뻔했다는 것이니
모든 것을
명명백백 까발리고 짚어주는 것이
내 목표였던 거다.
그리고 그 임무
아주 만족스럽게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