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되면
엘사의 왕국이 되어 버리는 이곳에서
원 없이 눈을 보며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보냈다.
그러다 1월의 어느 날,
우리가
미국으로 재 발령을 받아 나온 지
딱 1년째 되는 날
세상은 뒤집어졌다.
12월부터
바이러스에 관한 뉴스가 돌더니
사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하였고
정확한 이유와 치료법이 없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
전 세계는 패닉에 빠지고
결국 WHO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바이러스는
COVID-19이라는
정식 명칭을 갖게 되었지.
보이지 않는 존재로
공포감은 있었지만
설마설마하며
저 멀리 남 일 대하듯 여기던
초창기.
사람들은 그래도
일상을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출근을 하고 등교를 하고
마트를 가고 친구들을 만나고.
나 역시 평소처럼
어덜트 스쿨에 출석 한 어느 날
수업 중에 교실 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오피스 직원은
새로운 학생이 있다고 말했고
모두가 주목하던 그때
교실로 들어온 건 S였다.
거짓말쟁이 J의 베프 S.
사장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본모습을 보여 준 S.
날 피해
어덜트 스쿨 오후반을 다니던 S.
S는 내 모둠으로 직진했고
하나 남은 빈자리에 앉더라.
날 보고
일부러 내 쪽으로 온 건가 싶었는데
가까이 와서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표정을 보니
내가 있는지 모르고
빈자리만 쳐다보고 온 거구나 싶었다.
수업 도중이라
말없이 목례만 주고받은 이후로
나는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왜 왔지?
왜?
왜??
왜???????
그럼 이제 매일 볼 텐데
나는 S에게
얼마큼 마음을 열어야 하는 건가?
처음엔 안면을 트고 싶었다.
그래야
날 왜 피했는지
답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조심스러워지더라.
도대체 이 여자가
얼마만큼의
J의 영향권에 들어섰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 5일을
같은 모둠에 있게 되면서
(지정석은 아니지만
다들 한 번 앉은자리에
계속 앉는 분위기)
가볍게 주고받던 일상 이야기들은
점점 폭이 넓어졌고
자연스레
전화번호 교환까지 이루어졌다.
사모는 나를 통해
S의 등장을 알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소식을 업데이트해 주길 원했다.
소식이랄 게 있나.
그냥 아침에 교실에서 만나 수업받다가
쉬는 시간에
어쩌다 나누는 대화가 전부인 것을.
그래도
사모가 알기를 원한 이유는
바로 J 때문.
사모는 J를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J의 전적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주변에서 들려오는 J의 소식은
사모를 신경 쓰게 만들었던 거다.
그중 한 가지는
한인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까지 하며
맹활약을 하던 J가
어느 순간 교회를 바꿨다는 건데
분명 그곳에서
무슨 사고를 쳤을 거라는 게
사모의 생각이었다.
워낙에 한인 커뮤니티가 좁은지라
뭐든 소문은 금세 퍼지고
와전까지 되는 모습이다 보니
사모는 주재원 부인들이
그곳에서의 한인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기를
바랬던 사람이다.
여기서 아무리 외로워도
우리는 곧 돌아갈 사람들이고
회사를 대표해서 온 것이니
조용히 있다 가자는 게
사모의 뜻이었지.
그런 면에서 J는
사모에게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이었던 거다.
게다가
사장님과의 식사자리에서
부사장님 앞에서 보인 언행을 통해
그 폭탄의 사이즈를
확인했으니 말이다.
그런 J와 베프로 지내는 S이니
사모와 통화를 할 때마다
S는 자연스레 나오게 되는 소재였다.
COVID가
점점 심각해져 가는 상황 속에
우리는 3월을 맞이했고
어덜트 스쿨은 무기한 휴교를 시작했다.
3월의 첫 번째 목요일 오후,
사모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평소처럼 우린 통화를 이어나갔다.
"걔 때문에
내가 얼마나 답답한지 몰라!
애가 말도 안 되는 똥고집도 있고
사람 말을 안 듣는다니까! "
S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까지 불만과 짜증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들어보니
어덜트 스쿨에 다니는 목동언니
(목동에 살다 온 한국분이라
내가 그리 불렀다)를 통해
한인 교회 사람들과 엮임이 있었는데
그걸 사모가 알고 원천 차단하고 싶어
닦달을 좀 했나 보다.
왜냐하면
거기엔 J가 연결 돼 있을 거라
확신을 했기에
반드시
시끄러운 일로 이어질 거라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S가 자꾸 J와 한통속이 되는 게
사모는 싫었던 거 같다.
그래서
S에게 계속해서
J의 실체에 대해 알리고
멀리해라 주의시켰는데
가스라이팅을 당한 건지,
결이 같은 건지
S는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걸로
받아들였고
J를 욕하는 사모에게
반감이 들었던 거다.
그리고 그 감정으로
둘은 통화하다가
잠시 불이 붙었던 모양이었다.
사모와의 통화를 마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리곤
S의 연락처를 찾아 문자를 보냈다.
'내일 오전에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오실래요?'
왜냐하면
사모가 그 일을 알게 된 경로의 시작은
나였기 때문이다.
매번 묻는 S의 소식에
나는 생각 없이 답을 했더랬는데
사모는 그것을 혼자 확장시켜
S를 쪼아댄 거였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그 걸 알게 된 이상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해 준 말을
그렇게 써먹으면 어찌하느냐
사모에게 따질 용기는 없었고
이미 일도 벌어졌으니
주어 담는 쪽을 택한 거였다.
같이 수업을 들으며
어색함은 깼더랬고
언제 한 번 놀려오시라는 말을
둘러놔서 그랬는지
좋다는 답을 받았다.
다음 날 금요일,
10시쯤에 맞춰 S가 왔고
나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한 후
식탁으로 안내했다.
"아침에 애들 보내고 오시느라
바쁘셨죠?
S가 자리에 앉아
점퍼를 벗으며 대답하는 사이에
나는 커피와 마들렌을 준비해서
식탁을 향해 돌아 섰는데
그때 내 눈에 들어
온 S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의자 앞쪽으로
엉덩이만 걸치고 앉아서
깎지 낀 두 손을
식탁 위에 올리고 있었는데
말라서 그런 건지
우리 집이 춥게 느껴져 그런 건지
팔을 몸통에 바짝 붙이고
왜소하게 웅크린 듯한 모습으로 앉아서
내 움직임에 따라 날 쳐다보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초초하고 불안해 보였다.
내 입에서
사형선고라도 떨어질까 봐
무척이나 긴장되는데
그걸 꾸역꾸역 숨기고
아닌 척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였달까.
'아, 그냥 친목의 자리로
예상하고 온 건 아니구나' 싶었고
'이 여자도
사모에게 말을 전한 게 나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싶었다.
S가 소통하는 사람은
J와 나(어덜트 스쿨에서) 뿐인데
J는 같은 편이라고
확신을 한 상태에서
사모에게 쪼임을 당했으니 말이다.
순간,
어제 내가 보낸 문자를 받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지,
오늘 우리 집까지
어떤 기분으로 왔을지가
한눈에 보이더라.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사모에게 뒷말을 전한 꼴이 되어서
사모에게 쪼임을 당한 것이고
그 말을 전한 사람이
나일 수 있다고 의심하는 상태이지만
내가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해서
본인을 집에 부른 거라는 건
모르는 상태.
그러니
'무슨 말을 하려나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 하며 왔겠지.
"생각보다 저희 집이 댁에서 가깝죠?"
"아, 네~ 금방이더라고요"
먼저
S의 긴장도를
낮춰야겠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꺼냈다.
아이들 학교생활은 어떠한지,
COVID로 학교도 닫았는데
뭐 하고 지내는지,
건강들은 괜찮은지 등등등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에 언제 와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적응하는 데에
뭐가 얼마큼 힘들었는지,
여기 나와 있는 주재원 부인들은
누가 있고
서로 어떻게 교류하며 지내는지
등등등
그러면서 일부로
개인적인 고충도 털어놨다.
"제가 원래
승무원으로 일했었거든요.
그게 알려지면서
사실은 마음이 좀 힘들었었어요.
사람들이 승무원이라고 하면
되게 여우 같고
남 얘기 떠드는 거 좋아하고
사치하는 이미지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런 선입견으로 절 대하니까
힘들더라고요.
저는
제가 정말 자신하는 게 딱 하나예요.
절대 입방정 떨지 않는 거!
제가 제 직업 때문에 많이 당했어서
그런 인간들을 제일 싫어하거든요 "
내 계획은 간단했다.
누가 이랬죠? 저랬죠? 하면서
다른 사람 끌어들여 설명하고
아니라며 변명하고
이해시키려 애쓰는 거보다
그냥 내 얘길 해 주는 거.
간접적인 방법이라
내 의도대로 먹혀들 진 모르겠으나
억지로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돌리려는 것보다
믿을 만한 정보를 주고
그걸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이해하게 한다면
그 효과는 더 강력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J가 내 얘길 했다면 뭐라 했을지,
S가 그 얘길 듣고
날 어떤 인간으로 생각했을지
나는 딱 짐작하고 있었기에
그 부분을 짚어 댄 것이었다.
더불어
사모 이야기도 했더랬지.
"저는 처음에
사모님이 제일 어렵더라고요.
윗 분이시기도 하고
성격이
되게 솔직한 분이시구나 해서요."
그랬더니 살짝 웃더라.
동감의 표현이겠지.
"근데 알고 보면
마음 되게 여리시고
생각도 깊으시더라고요.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이
좀 세다 보니까
처음엔 오해를 했었는데
그게 다 결국은
상대를 위해서 하시는 것들
이더라고요.
챙겨주시는 것도 엄청 잘하시잖아요
(S도 여러 번
반찬을 해 받은 걸로 알고 있다).
그냥 그 마음을 전달하는 면에서
성격이 다르다 보니
거부감이 들 수 있는데
알고 보면 참 따뜻한 분이세요"
S는
자기를 들 쑤셔놓은 사모가
얼마나 밉겠는가.
그걸 하나하나 고깝게 보지 말고
결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이해해라,
싸우자는 의도가 아니니
크게 생각해라 라는
말이하고 싶었던 거다.
대꾸 없이
가만 듣고 있는 S의 모습은
나에게 긍정적으로 인식되었고
처음보다 많이 자연스러워진 행동과
표정 그리고 늘어난 말수를 보고
이제 됐구나 했더랬다.
그러고 나니 내 마음도 편해져서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S의 전화가 울렸다.
남편 염 차장이었다.
"사실은
오늘 저희 결혼기념일이거든요.
아이들 학교 보내고
같이 점심 먹기로 해서~"
"아, 그럼 얼른 가보세요!
기다리시겠네요!"
어찌 마무리 하나 싶었는데
잘됐다 싶더라.
결혼기념일 축하드린다면서
다음에 또 이렇게 뵙자 하니
활짝 웃으며 네네 대답하는 S.
문 밖까지 배웅을 하면서
잘 가시라 인사를 했고
S도 걸으면서
연신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문을 닫고 들어오니
갑자기 힘이 쫙 빠지면서
힘이 하나도 없더라.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도
모든 게 내 의도대로 흐른 거 같아
홀가분하고 만족스러웠다.
온몸의 찜찜한 감정들이
발 끝으로 흘러나가
완벽하게 배수된 기분이었달까.
그런데 지금 보니
그때 흐뭇해하던 나 자신이
너무 안타깝고
바보등신 같고 불쌍하네.
정확히 3일 후,
지옥으로 떨어질지 도 모르고
저랬다니 말이다.
2020년 3월 9일 월요일
최악의 진흙탕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재원, 부인들의 내조 전쟁터'
1편을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끝이냐구요?
노노~
발단과 전개를 보셨으니
이제 절정과 결말을 보셔야지요.
기대 이상의 욕 나오는 막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편도 함께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