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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주양 Sep 11. 2024

12. 미워해도 괜찮아 (상)

판타지힐링소설(꽃이피면오세요)


#12


아주 먼 옛날, 언위에 홀로 있는 복숭아나무에서 느닷없이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만큼 엄청난 화력이었으나, 오직 언덕 중앙에 그 나무만은 작은 그을음 하나 없이 멀쩡했다. 오히려 제 머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닌가? 조금 뒤 아기 울음소리가 나무 밑동에서 들려온다. 울음에 맞춰 거센 불은 더욱 크게 입을 벌렸으나 그럴수록 그 안에 생명은 안전해 보인다. 아기는 나무 위로 올라갈 만큼 빠르게 성장했고 굵은 비가 내리쳐도 꺼지지 않던 불길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나무는 소년에게 열매를 먹이고 잎사귀 이불로 몸을 덮어주며 나뭇가지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나무 옆에 터를 잡고는 멀리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왔다. 그에게 복숭아나무는 포근한 엄마이자 애틋한 고향이었다.




“언제 태어났다고?”

“태초에 땅이 생겨나고 물과 물이 나뉘고 바다에는 물고기가 육지에는 나무와 꽃이 생겨났을 쯤일까?”

“그럼 네가 아담이야?”

“믿지 말라 옹! 지가 태초의 사람이란당! 나무랑 꽃이랑 동물 이름도 다 자기가 지었다는뎅? 허언증 장난 아닌 새끼다옹! 나폴리 증후군!”

“복실아.. 리플리 증후군이야..”

“카르릉”

“수호야, 잘 생각해 봐. 과거의 기억은 조작될 수도 있어.”

“소년에게는 늘 달콤한 향기가 났어.”


티브이 탁자에 다리를 올려놓은 수호가 일인용 소파에 등을 깊게 묻으며 먼발치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수호야.. 너 복실이 병 옮았니. 자꾸 허세가..”     


마리가 하려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난데없이 끄아아오옹! 뭉툭한 손톱을 세우고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는 복실이의 포효가 안마당을 유영하던 파리떼들을 한방에 몰아냈다. 복실이가 왜 저러는 지 영문을 모르겠는 마리가 놀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수호에게 손짓을 해보지만, 이 난리통에도 요동치 않고 소파에 누워만 있는 복숭아 소년이다.

     

“끼야아아옹! 왜 상처를 드냐앙! 역병은 인간이 퍼뜨린거다옹! 아빠앙! 엄마아아앙!”     


삽시간에 수호의 방부터 주막 안마당까지 쑥대밭이 되어버린다. 머리 위로 음료수 페트병과 잡지들이 비행기처럼 날아가 마당 중앙으로 매다 꽂힌다. 어찌할 바를 몰라 엉덩이만 들었다 놨다 하는 마리가 수호의 어깨를 다급하게 흔들었으나, 자칭 태초의 인간 수호는 바람인형처럼 나풀거릴 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불끈, 진짜 확 마! 잔뜩 열이 오르는 그녀는 빈주먹을 요란하게 휘두른다. 비명소리와 우당탕 무언가 부서지는 아찔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억 한줄기가 있었는데..


"콜라병, 물병, 염병 모든 단어에 병자를 붙이는 건 금지야!"


주막으로 이사 오기 전 수호가 일러준 권고가 부표처럼 두둥! 떠올랐다. 마리는 주먹으로 이마를 통통 내리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늘상 그 경고를 기억하며 생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주막에서 지킬 규칙이 얼마나 많은데.. 마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대충 떠오르는 것들을 되뇌어본다.


1. 아침에 큰소리 내지 않는다. 복실이가 짜증 낸다.

2. 끼니는 놓치면 안 된다. 복실이가 짜증 낸다.

3. 일주일 두 번은 소고깃국 끓여야 한다. 복실이가 짜증 낸다.


노트 열 장을 훌쩍 넘기는 사항들을 받아 적기는 했으나 솔직히 단 한 번도 펼쳐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실이의 반응이 저렇게 폭발적일걸 알았다면 구구단처럼 달달 외우고 지키려 노력했을걸.. 후회해 봤자 이미 요단강을 건너 반대편을 향해 손까지 흔들고 있다.


“복실아 진짜 미안해! 소고기 사줄까? 아니면 미용실 갈까?”     


복실의 발작버튼이 눌러진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내던지고 있는 고양이를 뭐로 진정시킬 수 있을지 골몰하는 마리에게 수호가 한가로운 어투로 말했다.     

 

“그냥 둬. 지금은 뭘 해도 소용없어. 한 시간 정도는 채워야 끝나..”     


꽃길만 걸으세요, 방에 문짝을 뜯어 내 던지는 복실이를 공포반 걱정반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마리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잔뜩 주눅 든 음성으로 웅얼거렸다.     


“우리 새언니가 놀이치료사라고 한 적 있지? 언니병원에 데려가볼까? 아동전문이라서.. 복실이한테는 딱인데.”     


마리의 물음에 수호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댄 채 옆으로 누우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천하태평 수호를 잠시 흘겨보던 마리가 태풍 복실이 1호가 휩쓸고 간 잔해를 수습하며 안쓰러운 고양이의 과거를 떠올렸다.     


"1392년 즈음 고려가 멸망한 해였던 걸로 기억해. 나라에 무너짐과 함께 마을에 역병이 퍼졌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고양이가 원흉이라는 소문이 돌았어. 나라가 망한 것도 마을에 역병이 퍼진 것도 모두 고양이와 고양이를 키우는 독녀(나이 들어 자식과 남편 없는 여자들을 지칭)들 때문이라고.. 무구한 생명들이 죽임을 당했지. 날마다 피비린내와 억울한 비명이 진동을 했어. 그럼에도 계절은 꽃을 피우고 성실하게 열매를 내줬지.. 그날도 꽃향기가 가득한 날이었는데.. 언덕마을에 대대적인 고양이 학살이 시작됐어. 살인에 취한 인간들이 숲으로 쳐들어와 평화롭게 살던 복실의 가족들을  칼로 찌르고 목을 매달아 죽였어. 복실이는 엄마와 깊고 좁은 동굴로 간신히 몸을 숨겼지만 깊은 상처를 입은 엄마는 복실의 옆에서 차갑게 식어버렸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빨던 녀석을 데려와서 젖동냥으로 애지중지 키운 게 바로 나야. 그때 저 새끼, 엄마 젖을 물고 놓지를 안아서 대신 내 손가락 물려준 기억이 나. 아직도 나는 비 오는 날만 되면 이 손가락이 아파.. 저 저 먹깨비 같은 놈 때문에!"


이것이 가족을 잃어 슬프고 억울한 복실이와 비 오는 날만 되면 손가락이 아픈 수호의 깊은 역사이다.

   

“수호야, 복실이도 과거에 들어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오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바닥에 흝어진 복실이의 최애 패션잡지를 주워 담던 마리가 소파에 누워 거드름피고 있는 수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호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왜? 동물은 안 되는 건가..”

“그게 아니고, 복실이는 초대를 받은 적이 없어.”


수호의 말의 마침표를 찍을 그때였다, 느닷없이 시작된 발작처럼 순식간에 난동을 멈춘 복실이가 순하디 순한 눈으로 웅얼거렸다.


“복실이도.. 들어가고 싶다옹..”     


마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양손을 펼치면서 복실에게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우리 복실이는 부모님 만나면 뭐 하고 싶니?”     


마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복실이의 작은 두 눈에 영롱한 이슬방울이 맺혔다.


“나는 말이다옹.. 맘빠 입에 케이크 먹여주고 싶다옹..”     


쪽마루 위에서 낮잠을 자던 카카가 앞다리를 쭉 피며 기지개를 켜더니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는 마당으로 껑충 뛰어내린다. 직장인이 일터에 가는 표정으로 복실이 무릎 위로 올라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받아먹는다.


“그랬구나. 우리 복실이가 마음이 참 아프겠구나.”     


마리는 어느새 복실이 코앞까지 다가와 양반다리를 하고 마주 앉았다.   


“배가 고파서.. 엄마젖을 물었다옹. 엄마 배에서 피가 나왔다옹. 엄마 몸이 차가웠다옹. 복실이도 빨리 차가워지길 바랐다옹! 눈 떠보니 주막이었다옹. 인정하긴 싫지마능. 집사새끼가 날 살렸다옹. 삼 년 지나니까 인간으로 변했당. 울 엄빠가 나 못 알아볼거다옹. 으응 복실이는 인간 된 거 싫다옹..”    

 

복실이의 빵빵한 두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아기처럼 우는 복실이를 지켜보는 마리의 가슴은 미어졌다. 슬픈 고양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같이 울어주는 것뿐이라.. 복실이의 넓은 등을 꽉 끌어안고 흐느꼈다. 성실한 강아지, 카카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복실이와 마리의 무릎을 바쁘게 오고 간다.      


“저 새끼 처음에는 얼굴만 인간이었어. 다섯 해쯤 되니까 팔다리 순으로 변하더라? 생각해 봐 얼마나 징그러웠겠냐고. 몸은 고양인데 얼굴은 사람인 거야! 그것도 귀엽고 예쁜 그런 얼굴이 아니야! 지금 저 얼굴이었다니까? 맨날 복실이 싫어! 이름 바꿔줘! 혀 반 잘린 말투로 쫓아다녔다니까? 그것도 저 얼굴로!”     


소파에 비스듬히 앉은 수호가 어깨를 오므리며 치가 떨린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뒤탈은 생각을 않는지.. 곧 쓰나미가 몰려올 것을 예감한 마리는 카카를 안고 멀찌감치 몸을 피했다.


“뭬야? 이 새끼야 앙!”      


오랜만에 멱살을 잡고 드잡이를 하는 수호와 복실을 쪽마루에 앉아 가만히 응시하던 마리는 영원히 늙지 않는 저들과는 달리, 자신은 시간에 맞춰 나이가 들고 주름이 생기고 등이 굽고 눈을 감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 더없이 심난해진다. 영원한 생명이 부러운 건 아니지만 저들과의 이별은 두렵다. 어느새 마음 깊이 수호와 복실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다.


“나의 찬란한 인생책의 책갈피 꽂아 놓은 페이지가 그대들이야...”


그녀의 애틋한 고백은 멱살잡이에서 머리채를 잡고 아귀다툼하는 저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쳐흐른다. 대출을 받아 오픈한 주막카페에 손님 한 명 오지 않아도.. 매달 내야 하는 은행이자에 눈앞이 캄캄해도. 언젠가는 이별 앞에 슬퍼할지라도. 같은 공간에서 웃고 싸우는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고 즐기고 빈틈없이 행복할 거라 다짐해 본다. 그때였다 야외 마당에서 시끌벅적 사람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틈에 강아지 카카가 대문을 응시하며 귀를 쫑긋거렸다.


"카카야! 손님 온 것 같아?"


마리는 밖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 승자 없는 싸움을 하는 수와 복에게 조용히 해! 고함을 질렀다. 카카와 마리는 번개처럼 쪽마루에서 내려가 대문으로 내달렸다. 손까지 벌벌 떨어가며 목문에 두꺼운 빗장을 열어젖혔다. 첫 손님이다! 첫 손님! 두근두근 방망이질 치는 소리가 심장을 뚫고 나온다. 문이 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카카가 높은 문턱을 껑충 뛰어 바깥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수호와 복실은 서로에게 양손이 엉겨 붙은 채 대문을 노려보며 씩씩거렸고 입이 귀까지 걸린 마리는 주막카페의 첫 손님에게 영혼이라도 바칠 기세로 나무대문에 문턱을 넘었다.


 “어서 오세!”


호기롭게 대문을 열어젖힌 마리에게 무슨 일이 난 건지 다소 격앙된 그녀의 인사말은 중간에서 끊어졌고 대문 사이에서 오른발만 나가 있는 채로 굳어버렸다. 더군다나 마리보다 앞서 나간 카카는 요란스럽게 깡깡 짖다가 이내 낑낑거리며 서럽게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이에 새우젓눈을 와짝 뜬 복실이가 머리채를 잡은 손을 놓으면서 수호를 세게 밀어재치고 나무대문을 향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어리둥절, 평상밑으로 떠밀려온 더벅머리 수호는 쩔쩔매면서 같은자리를 빙빙 돌다가 잰걸음으로 주방 개수대 밑에 몸을 숨긴다. 쪼그려 앉아 거친 호흡을 내뱉다가 머리를 한번 세차게 흔들고 일어나 베이커리 유리진열장에 일렬맞춤으로 줄 서 있는 빵과 파이들을 살피더니 주문을 외우듯 웅얼거렸다.


“안녕하십니까? 주문하시겠습니까? 안녕하세요? 주문하세요? 안녕하시렵니까? 아아악”


생각처럼 되지 않는지 뒤통수를 벅벅 긁는 수호의 귓가에 마리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호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대문 쪽으로 자라처럼 목을 빼들었다.


“엄마? 지우야!”


카카의 우는 소리에 놀라 뛰쳐나갔던 복실이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안마당으로 되돌아오더니 옷걸이에 걸려있는 챙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수호 옆에 딱풀처럼 붙어서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다.


 “손님 오랜만이다옹.. 복실이 무섭다옹! 복실이 귀 안보이징?”


조금 전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연리지나무처럼 맞붙어있다.


 “수. 복! 나와 볼래? 우리 식구들 소개할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가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이어서 마리와 눈이 닮은 노년 여성이 카카를 품에 안은 채 뒤 따라 들어왔고. 그 옆에는 마리와 입술이 똑 닮은 노년 남성이. 그 뒤에는 마리가 남자라면 저렇게 생겼겠구나 싶은 성인남성이. 또 그 옆에는 마리가 어렸을 때는 저랬겠구나.. 싶은 아기가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 품에 안겨 들어왔다.


“어머머! 야외도 널찍하니 좋은데 안에도 이렇게 넓은 마당이 있어?”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는 마리의 엄마, 선자가 흐뭇하게 미소 짓는다.


“아가씨! 정말 좋아요. 한강이 사방에 내려다보이고. 서울 한복판에 이런 데가 있었어요?”


지우와 하얀색 원피스를 맞춰 입은 원영이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옆에 있던 정욱은 [잘 풀리는 집] 글자가 박혀있는 선물용 휴지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큰 음성으로 뱉는다.


“언덕이 가팔라서 사람들이 여기까지 올라오려나? 차도 못 올라오고.”


그런 정욱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원영이 흘겨보는 눈으로 경고를 날린다.


"손님이 없어. 손님이 주말인데."

"으으으! 정신 챙겨라! 이정욱! 그 입 다물라!"


원영이 이를 악물면서 정욱의 팔뚝을 꼬집어 뜯었다.


“차츰 좋아지는 거지.. 자리가 좋아서 입소문만 나면 잘되겠다!”


엥? 아빠 입에서 저런 따뜻한 말이? 낯선 표정의 마리가 희섭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선자가 눈을 찡긋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마리야 요즘 아빠가 어딜 가도 네 자랑만 한다?”


마리는 귓불이 붉어지는 걸 들키지 않으려 잰걸음으로 안마당을 가로질러 커피머신이 있는 데스크 안으로 몸을 숨기듯 들어갔다. 그러고는 가족들에게 등을 돌린 채 온장고에서 데워진 찻잔을 꺼내며 의연한 척 입을 열었다.


“다들 앉으세요. 그전에 주문들 하시고요.”


마리는 꿈틀꿈틀 올라가는 입 꼬리를 끌어내리며 커피머신 작동버튼을 눌렀다. 조금 뒤 기계에서 윙! 굉음이 들렸고 수호는 탱크에 차가운 물을 부었다.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 희섭의 눈빛에는 많은 감정이 뒤엉켜있다. 미안함 안쓰러움 기특함과 죄책감.. 일순간 숙연해진 주막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그때 새언니 원영이 밝은 음성으로 정적을 몰아냈다.


“수호 씨! 복실 씨! 안녕하세요! 아가씨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저희 아가씨랑 고생 정말 많으셨어요. 사업 번창하시길 바랄게요.”


손에 들린 꽃바구니를 건네며 다가서는 원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수&복은 서로의 어깨를 떠밀면서 복화술을 하고 있다.


“느그 믄즈 은스해... 쁠리 느그 은스해 (네가 먼저 인사해 빨리 네가 인사해)”

느그 믄즈 흐르응 느 으그를 브은 응븐으느으능 (네가 먼저 하라옹. 너 유교를 배운 양반아니었냐옹!)


유리 진열장 뒤에 숨은 수&복은 메트로놈처럼 서로의 어깨를 밀쳐낸다. 왼쪽으로 한번 오른쪽으로 한번 정확한 박자를 타고 있는 수와 복에게 눈을 떼지 못하던 지우가 까르륵, 종달새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날갯짓을 다.


“얘들이 대인기피증이 있어서...”


케이크와 파이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오는 마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고즈넉했던 주막카페 안마당은 커피 향과 웃음소리로 가득 차오른다. 평상 위에 놓인 좌식 테이블 위에는 커피와 레모네이드 치즈크림이 듬뿍 든 파이와 갓 구운 소금 빵이 거나하게 차려졌다. 마리가 만든 수제 요구르트가 입에 맞는지 금세 한 그릇 뚝딱한 지우가 복실을 향해 두 팔을 벌려 찡찡거린다.


“왜.. 지우! 저 아저씨한테 가고 싶어?”


원영이 맑게 웃으며 웨이터 인형처럼 구석에 처박혀있는 복실에게 지우를 안겨준다. 얼떨결에 작은 아기를 아 든 복실의 안면이 잔뜩 굳어졌다. 목 뒤에 온오프 전원이 달려있는 로봇이라도 된 듯하다. 그것도 고장 나 버벅버벅 랙이 걸린 고물 로봇. 카카는 그리웠던 엄마와 형아의 무릎을 번갈아 차지하고는 가끔씩 지우를 흘겨보긴 하지만 전처럼 으르렁거리진 않는다.


"카카야.. 형아가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혼낸 것도 미안하고. 다 미안해. 핑계지만... 형이 아빠가 처음이라서 좀 긴장했었어. 가장이 된 것도 처음이라서 예민했었어. 형에게 닥친 모든 환경이 무겁고 버거워서 카카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어. 그렇다고 우리 카카를 사랑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야. 형은 세상에 많은 강아지들 중에 우리 카카를 제일 사랑해. 형이 맡은 책임이 갑자기 많아져서 카카를 키우지는 못하지만, 매일 너를 생각할게. 너 아닌 다른 강아지는 절대 너만큼 사랑하지 않을 거야. 형의 첫사랑은 영원히 우리 카카뿐이야.."


정욱은 연신 카카의 배에 입을 맞추고 볼을 비볐다. 카카는 그런 정욱에 얼굴을 열심히 핥아준다.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원망한 적이 없어요.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을 미워한 적이 없어요. 나의 단 하나의 사랑은 오직 당신뿐이에요.. 카카는 그동안 하고 싶던 많은 것들을 정욱의 눈을 바라보며 쏟아낸다. 쏟아내도 쏟아내도 다시 차오르는 정욱을 향한 사랑을...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안부라도 좀 묻지, 한번 안 물어놓고 웬 오버?"


마뜩잖은 표정의 마리가 정욱을 흘겨본다.


"네가 내 전화는 안 받잖아.."


정욱의 웅얼거림에 마리는 데스크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휴대전화 보고 흠칫 어깨를 올렸다 내린다.


'아.. 오래전에 차단했었지?'


마리는 헛기침을 하면서 못 들은 척 평상에 떨어진 빵조각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래도 오빠가 아가씨 엄청 생각해요. 저번에 오빠 친구들 모임에서 자상해 보이는 남자가 있길래, 저 친구분 아가씨 소개해주는 거 어때? 했더니 아우 저를 잡아먹을 듯이 난리를 치는 거예요! 감히 누구를 어디다가 붙이냐면서! 내 동생이 우스워? 이러면서 저를 아주 나쁜 여자로 만들었다니까요?"


정욱이 꿍시렁 거리며 카카를 안고 몸을 돌리자, 원영은 왜 부끄러워? 얼굴을 들이밀면서 연신 깔깔거린다. 뭐 하나 맞는 게 없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투닥거리지만, 서로를 재밌어하는 사람은 어느새 부부라는 이름으로 끈끈해지고 있었다. 마리는 허브티가 담긴 찻잔에 입술을 대며 조용히 웃었다. 그런 마리 옆에 양손을 무릎 위에 일자로 붙여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수호가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소리로 시끌벅적한 주막의 풍경을 낯설게 바라보던 수호는 문득 먼 길 떠나는 나그네들로 가득했던 옛 주막이 그리워졌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갓 입대한 신병 같은 수호를 유심히 살펴보던 희섭이 넌지시 말을 붙인다.


“청년 얼굴이 낯이 익네요.”

“네! 그렇습니다!”

“네?”


우렁차게 대답하는 수호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희섭이 놀라 되물었다. 이에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마리가 중간에서 손을 휘저으며 가로막았다.


“얘들이 사회성이 많이 떨어져. 되도록 말을 걸지 않는 쪽으로 해주세요.”


상기된 마리와 굳어있는 복실과 기합이 잔뜩 들은 수호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원영이 센스 있게 말을 돌려 화재를 전환시켰다.


“아가씨 그 회사 너무 힘들었잖아요, 그만둬서 정말 다행이에요.”

“새 언니 덕분이에요. 언니가 그만둬도 괜찮다고 말해줘서 용기를 얻었어요. 고마워요 언니.”

“아가씨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아무도 신경 쓰지 말고, 오직 아가씨만 생각해요. 알았죠? 그리고 언제 막내 동생 데려와서 사진 좀 찍을게요. 요즘은 sns로 홍보해야 한다고요.”


원영이 마리의 팔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마리는 싱긋 웃어 보이다가 정욱을 향해 휙 고개를 돌리며 팔짱을 꼬았다.


“언니 요즘도 이정욱이 미친 사람처럼 어질러요?”

“말도 마요.. 아가씨 알죠? 이정욱 씨의 이중 주차 사건?”

“엄마가 잘 못 키운 거야!”

“그래 다 내 죄다..”


선자가 치즈파이를 입에 넣으며 힘없이 웃었다. 그러더니 마리에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근심 가득한 입술을 열었다.


“그나마 대기업 다닌다고 하면.. 선 자리도 잘 들어오는데.. 내일모레 서른인데 어쩌려고..”


말끝을 흐리는 선자를 돌아보며 희섭이 펄쩍 뛰었다.


“마리가 행복하면 되는 거야! 결혼이 마리를 위한 거야? 부모 욕심인거지!”

“그럼요 아버님! 멋있게 혼자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본래 인연은 가까이에 있데요..”


원영의 말이 끝나자, 여덟 개의 눈들은 일제히 수호에게 집중된다.


‘뭐래..’


마리는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미간과 따로 노는 입 꼬리는 점점 하늘을 향해 승천한다.




자정이 넘어서 주막을 떠난 마리의 가족들은 수호의 미모에 한번 반하고. 소금빵 맛에 두 번 반하고. 황금빛 노을과 윤슬을 뽐내는 한강에 세 번 반하고 돌아갔다. 내내 복실의 품에 안겨 찰랑거리는 고양이의 머리칼을 겁도 없이 잡아당기며 즐거워했던 지우는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자 짧고 오동통한 팔로 복실의 목을 꽉 잡고 우렁차게 울어댔다. 그런 지우를 향해 태연하게 손을 흔들고 아무렇지 않게 보낸 복실이었지만 돌아서서 흘린 눈물은 평생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주막카페 마감합니다.”


언덕 아래까지 가족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마리가 목문의 무거운 빗장을 걸어 잠그며 외쳤다.



꽃이 피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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