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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주양 Sep 12. 2024

13. 미워해도 괜찮아 (하)

판타지힐링소설(꽃이피면오세요)


#13


“마라탕! 가족들 오랜만에 봐서 좋았겠어.”


수호는 젖은 행주로 테이블을 훔치면서 넌지시 물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퉁명스러워 보이는 마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수호는 마리를 유심히 살피다가 낮은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기분 별로야?”


대답 없이 평상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마리를 조용히 지켜보던 수호는 테이블 아래 간이의자를 꺼내어 앉아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한동안 주막카페의 안마당은 정적만이 맴돌았다. 수호는 마리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개수대에 설거지가 산만큼 쌓였어도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아빠가 많이 달라져서 신기하고. 엄마는 평안해 보이고 오빠랑 새언니는 여전히 토닥거리지만 그 안에 애정이 보여서 진짜 좋아 좋은데..


걸음을 옮겨 진열장에 남은 빵들을 지퍼 팩으로 옮기던 마리가 말끝을 흐리며 한동안 멍한 눈으로 진열장에 가득 쌓인 빵들을 응시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평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수호가 행주를 조몰락거리며 마리를 바라보았다. 마리의 침묵은 한참 이어졌고 주홍색 불빛이 새어 나오는 욕실에서 짜증스러운 언성과 물장구를 치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욕실이 워터파크인 줄 아는지 온데 물을 튀기며 물장난을 치는 카카와 엄포는 놓아도 강력히 막지 못하는 복실의 약한 모습이 안 봐도 눈에 선한 수호였다. 진열장 앞에서 한참 골몰하던 마리가 다시 걸음을 옮겨 냉동실 앞으로 걸어간다. 수호의 눈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마리를 따라갔다.


“수호가 열심히 만든 빵인데 만날 남아서 어쩌지?”


지퍼 팩에 담긴 빵들로 가득 찬 냉동실을 들여다보던 마리가 미안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침으로 먹고, 점심으로 먹고. 저녁으로 먹지?”


가벼운 투로 말하는 수호를 가만히 바라보던 마리가 설핏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호야...”

“응?”

“나는 정말 행복해...”


수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초점 없는 눈으로 서 있던 마리가 입술몇 번 달싹이다가 이내 굳게 다물었다. 수호 눈흐르는 잔잔한 호수가 잠시 일렁이더니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오늘은 나그네 방에서 자도 될까?”


나그네 방은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포기하려던 마리를 구해와 눕힌 장소이자 그녀가 복사꽃을 따라 과거로 들어갔던 방이다. 닳은 시간을 잘 보내준 이후부터는 그 방에 잘 들어가지 않던 마리였다. 수호가 의아한 얼굴로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왜 그러는데? 속내를 물어보며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 마리는 많이 지쳐 보인다. 수호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꺾고는 방으로 들어가는 마리의 뒷모습을 응시다가 나그네방의 문이 닫히자 몸을 돌려 보일러실로 들어갔다. 초가을 오후는 더웠지만 해가 저물면 쌀쌀해졌다. 따뜻하게 푹 자고 내일 아침이면 밝게 웃을 마리의 모습을 기대하며 나그네 방과 연결된 보일러 밸브를 열었다.


"나그네방아~ 마리의 근심 탈탈 털어질 만큼 푹 재우거라!"


무릎을 잡고 일어난 수호 입에서 응차, 소리가 절로 나왔다. 수호는 손을 털며 구석에 쌓여있는 장작과 연탄을 응시했다. 1930년까지는 장작을 때어 추운 겨울을 보냈다. 복실의 성화로 1960년에 연탄으로 바꿨고, 한참 월드컵으로 언덕까지 “대한민국~짝짝짝, 짝짝!” 환성소리가 울려 퍼지던 2002년에 가스보일러로 바꿨다. 그것도 복실의 끈질긴 떼부림이 한몫했지만 보일러로 바꾸고 더 흡족해 한 건 수호였다. 새벽마다 꺼지는 연탄불로 춥다며 엄살소동을 부리는 복실의 생떼를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언덕까지 연탄을 나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기뻤다. 입가에 설핏 번지는 미소를 머금고 지난 기억을 더듬던 수호의 낯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2002년 월드컵, 가스보일러 그리고 지연이... 잃어버린 딸을 찾아 과거에 머물 것을 선택한 가엾은 여자. 수호가 유일하게 구하지 못한 인간. 수호의 마음에 아프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 상처자국. 터져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키고 보일러실을 나왔다. 말끔히 정리된 안마당에 아스라이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내가 보일러실에 오래 있었나?’


수호는 웅얼거리며 보일러실 문지방을 넘어 디딤돌 위에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복실이와 카카의 코 고는 소리가 마른하늘에 천둥벼락이 치는 것처럼 요란하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마리가 들어가 있는 불 꺼진 나그네 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리야 잘 자고 내일 보자. 속에 담아두지 말고 빠짐없이 다 말해줘. 유치해도 괜찮고. 펑펑 울면서 화풀이해도 괜찮아.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백번 넘게 반복해도 괜찮아. 나는 네가 지금 당장 금붕어로 변해서 삼초의 기억력을 갖게 된다면, 삼초마다 말해줄 거야.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다음날 아침,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뜬 수호는 팔을 길게 펴고 기지개를 켰다. 잠시 천장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가 용수철처럼 허리를 튕기며 상체를 일으켰다.


"다들 일어났나? 오늘 아침은 뭐 하지? 수정과 한다고 잣 사놓은 거 있는데 잣죽 끓일까? 또 복실이가 잣죽이라면 환장을 하지. 마리는 잣죽을 좋아하려나?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싫어할 것 같은데. 흠.."


이불속에서 발만 꼼지락거리며 아침메뉴를 고민하던 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방문을 옆으로 밀자 오래된 미닫이문이 털컹 멈췄다가 드르륵 힘겨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들마루로 나오자 맞은편 사랑방 주인 복실이와 카카의 코 고는 소리에 귀가 아프다. 수호는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고는 나그네방으로 좁은 골목처럼 이어진 쪽마루로 몸을 비스듬하게 틀어 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마리야..”


나그네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춘 수호가 노크소리를 입으로 흉내 내며 마리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고개를 쭉 빼들어 댓돌 위를 살펴보니 마리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아침 산책을 간 것도 아닌데.. 웅얼거리며 엄지와 검지로 턱을 감싸면서 골똘한 표정을 짓다가 나그네 방에 노크를 하려는 그 순간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불안한 예감은 늘 적중했지만 이번만은 틀리기를 바라며 나그네방의 문을 벌컥 밀어젖혔다.


“이럴 수가..”


방안을 뚫어지게 주시하는 수호가 이내 창백하게 굳어버렸다. 마리는 온 데 간데 없이 복사꽃잎이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는 게 아닌가? 수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정승처럼 서 있는 복숭아나무로 내달렸다. 나무는 이미 분홍색 꽃으로 물든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제발 열려 있어라..”


수호는 복숭아나무 앞에 멈춰서 과거로 향하는 문이 열려있는지 간절한 마음으로 살펴보았다. 그때 고동색 나무 밑동에 미세한 빛이 흘러나왔다. 수호는 빛이 새어 나오는 나무 밑동에 손을 데고 집중하듯 눈을 감았다. 일순간 복사꽃이 수호의 몸을 감싸고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하얀 섬광이 폭발하듯 터졌고 남은 몇 장의 복사꽃잎이 공중그네를 타며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차가운 회색도시 과거에는 색이 없다. 그러나 이토록 차갑고 음산한 적은 없었다. 아니 딱 한번, 딸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어린 은별과 스스로를 가둔 지연의 과거도 이토록 을씨년스러웠다. 도저히 빛을 찾아낼 수 없이 어둡고 추운 머물러있는 시간. 수호는 움츠러드는 어깨를 뒤로 한 바퀴 돌린 후 가슴을 쭉 펴서 두리번두리번 열심히 마리의 흔적을 찾았다. 내딛는 걸음마다 얼음송곳이 박히는 듯 따가워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맨발이었다. 아뿔싸, 급한 마음에 신발을 챙겨 신지 못한 것이다. 수호는 발가락 끝을 오므리고 조급한 발걸음을 부지런히 옮겼다. 바삭바삭 살얼음 깨지는 소리가 귓전을 박았다.


“마리야.. 나 왔어..”


수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마리를 불렀다. 이곳은 마리가 어릴 때 살던 동네이자, 선자가 갇혔던 과거이다.


‘분명 익숙한 장소에 있을 거야!’


수호는 눈썹을 움직거리면서 선자의 과거 속에서 본 [지글지글 삼겹살] 식당으로 달려갔다. 헐떡이는 숨을 정리하며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흘긋 보았을 때,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황폐하게 부서져 있는 건물과 대로변에 멈춰버린 녹슨 차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속상한 마음과 영문을 모르겠는 답답함이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애써 막아내고 걸음을 멈췄다. 불타올라 재만 남은 옛 가게 터에서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야..”


반쯤 떨어져 나간 간판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삐걱삐걱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다. 수호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으로 뒤덮인 가게 내부로 들어갔다. 발바닥에 유리가 박혀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지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직 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먹을 꽉 지고 부서진 식탁과 의자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곳을 지나쳤다. 주방을 지나서 오른쪽 코너를 돌자 좁고 낮은 쪽문이 보였다. 그곳에서 마리의 숨결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수호는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몸을 날려 쪽문의 쇠고리를 잡아당겼다. 삐걱, 문이 열렸고 수호는 허리를 반쯤 숙이고 동굴 같은 방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자 부스럭부스럭 인기척이 들려온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살펴보니 아홉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소녀가 구석에 덩그마니 앉아있었다.


“마리..”


수호가 활짝 웃으며 마리에 이름을 불렀다. 몸을 낮추고 소녀의 곁으로 무릎을 끌고 다가갔다. 소녀는 살짝 눈을 들어 수호를 흘긋 훔쳐보더니 겁에 질린 짐승처럼 몸을 말았다.


“마리야.. 왜 혼자 여기 있니. 여기는 너무 뜨겁고 숨도 잘 쉬어지질 않는 걸? 함께 나가자. 역 근처에서 시식 빵도 돌리고 점심으로 칼국수 먹고 오자.. 응?”


수호는 달팽이처럼 얼굴을 숨긴 소녀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때 쿵! 굉음과 함께 철커덩! 쪽방에 철문이 닫혔다. 그러나 수호는 소녀에게 눈을 떼지 않고 내민 손도 거두지 않았다.


“후회할 거야...”


소녀가 천천히 얼굴을 들며 말했다. 수호를 노려보는 소녀의 눈빛은 싸늘했고 왠지 모를 분노가 서려있었다. 그 눈빛은 지연을 생각나게 했다. 수호는 마리를 지연처럼 놓치지 않을 거라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마리야 그게 무슨 소리야..”


수호가 간절한 표정으로 묻자. 어린 마리는 입꼬리를 한쪽으로 씩, 올리며 비아냥대는 어투로 말했다.


"오래전부터 너를 죽이려고 계획했어. 인간의 어두운 과거 속에 숨어서 말이야. 크크큭"


그건 마리의 음성이 아니었다. 말끝에 떨어지는 진동음은 인간의 것이라기엔 뭐랄까 소름 끼치는 휘파람소리 같기도 하고, 무당의 방울소리 같은 그런 소음에 가까웠다. 게다가 자신을 오래전부터 죽이려고 했다니..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 상황에 혼란스러운 수호는 답답한 심정을 애써 누르며 어린 마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어린 마리는 계속해서 수호를 노려보며 피식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마리의 어린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아도 살아있는 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수호의 애간장은 타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손톱 하나만이라도 마리의 색이 있어야 설득이 먹힐 텐데. 수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입을 열었다.


“왜 그런 나쁜 말을 하는 거야? 너는 그런 애 아니야.”

“그런 애가 아니야? 그럼 어떤 앤 데? 때리고 짓밟고 무시하고 조롱해도 웃는 애? 잘못한 사람이 사과하지 않아도 용서하는 애? 상처가 사라지질 않는데 괜찮은 척하는 애?”


안타까운 얼굴로 탄식을 내뱉는 수호에게 마리는 빈정대며 침을 툇, 하고 뱉었다.


"마리야.."


“날 죽도록 괴롭힌 정지혜! 퇴사할 때 그러더라? 후회할 거라고! 그래서 내가 뭐라 했는지 알아? 나는 행복하고 만족한다고 그러니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면전에 대고 비웃더라? 속으로 생각했어. 분명 악하게 사는 넌 벌 받을 거라고! 그런데 그 년 지금 어떻게 사는 줄 알아? 꿈에 그리던 영업팀으로 들어갔데. 지 사랑해 주는 남자 만나서 잘 먹고 잘 산데! 김도현! 애 낳고 아주 잘 살더라. 집도 샀데! 세상이 이렇게 개 같아. 선하게 살면 복 받는다고? 아니! 병신 되는 거야! 나는 첫 생리도 혼자서 처리했어! 모든 걸 혼자 감당했어! 왜 부모한테 말하지 않았냐고? 쉽게 말하지 마! 마음을 닫게 만들어놓고 왜 너는 말을 안 하냐고? 말을 안 한 내 잘못인 거야? 다 내 잘못이래.. 억울해하지 말래! 함부로 떠들지 마! 그래놓고 지들은 행복하게 웃고 떠들어! 내가 용서 안 했는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어! 내 상처는 문신처럼 박혀있는데! 지들은 홀가분하게 웃고 있어! 누구 맘대로? 아아아악!”


일순간 마리의 비명이 날카로운 화살로 변해 수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의 가슴 중앙에 화살이 꽂혔고 아악! 수호는 외마디 탄식을 내뱉으며 허리를 굽혔다.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살 속 깊이 파고들어 수호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쏟아졌다. 숨도 쉬지 못하고 주저앉은 수호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는 여러 마리의 뱀들이 마리의 몸에서 기어 나왔다. 가슴을 감싸 쥐고 있는 수호의 팔목을 조이더니 이내 천장으로 끌고 올라간다. 한 마리씩 수호의 양팔과 발목을 칭칭 감싸더니 뾰족한 대가리로 그의 손바닥과 발등을 뚫고 들어갔다.


“아아악!”


수호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과 함께 붉은 선혈이 물처럼 쏟아졌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수호의 몸은 천장에 열자로 박힌다. 붉은 피와 침으로 엉겨 붙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열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리가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수호의 손등을 뚫고 나온 뱀이 징그러운 대가리를 곧추세우고는 검은 혀를 날름거렸지만, 수호는 밑바닥 남아 있는 온 힘을 끌어내어 입을 열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일지라도 마리를 저대로 둘 수는 없었다.


“마리야.. 괜찮아 나쁜 말해도 괜찮고 용서하지도 않아도 괜찮고 미워해도 괜찮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잘 웃고 잘 먹고 잘 잤으면 좋겠어. 그것뿐이야. 주어진 삶을 잘살아내지 않아도 돼. 자주 넘어지고 만날 쓰러져 울어도 상관없어. 그것 또한 너의 삶이니까. 다만 너의 시간을 멈추지 마!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어 두렵더라도 계속 계속 흘러가서 너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렴..”


쿨럭, 선지 같은 핏덩어리가 수호의 입에서 울컥 쏟아진다. 그의 하얀 얼굴은 어느새 선혈이 낭자해 알아볼 수가 없을 만큼 끔찍한 몰골이 되었다. 꺼먼 혀를 날름거리던 뱀이 눈을 번뜩이며 대가리를 높이 쳐들더니 다이빙하듯 수호의 옆구리를 관통한다. 으드득,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수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만 쩍 벌린 채 찢겨진 몸을 비틀었다. 그럼에도 수호의 눈은 마리를 향해 있다. 그가 흘리는 피가 뚝뚝 떨어져 소녀의 얼굴을 물들였다. 흑백의 손으로 붉게 빛나는 피를 바라보던 마리의 눈이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현재 마리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다 멈추기를 반복한다. 천장에 박힌 수호가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싸움은 내가 할게! 그러니 너는 잘 먹고 잘 웃고 잘 자기만 해! 그것만 해! 알았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수호를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녀가 팔을 뻗을 때마다 수호를 못 박은 천장은 위로 쭉 올라가 손에 닿지 못하게 멀어졌다.


“수호야! 아악!”


울부짖는 마리를 안심시키려 고통을 참은 수호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가 시뻘겋게 물들었고 입가에는 끈적이는 핏덩이가 고드름처럼 매달려있다. 검은 비늘로 뒤덮인 뱀이 쉬쉬거리며 수호의 배를 관통하더니 갈비뼈를 완전히 분질러 버렸다. 으드득 잔인한 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던 수호가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악! 안돼 안돼! 도와주세요! 제발! 수호야 수호야!"


발을 동동 굴리며 머리칼을 쥐어뜯는 마리를 꽃무리가 에워싸기 시작한다. 마리는 황급히 손을 휘둘러 복사꽃을 수호 쪽으로 날려 보낸다. 복사꽃도 강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수호를 감싸려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어떤 힘에 의해 무색하게 흩어져 버렸다. 마리도 복사꽃도 수호를 잡을 수가 없다. 어렴풋이 수호의 허리를 붙잡은 어떤 여자의 슬픈 얼굴을 본 것도 같다. 복사꽃은 마리라도 데려갈 참인지 발버둥 치며 안간힘으로 버티는 그녀를 감싸 올렸다.


"안돼 안돼! 수호한테 가라고! 나는 두고! 수호를 감싸란 말이야!"


분홍색 소용돌이 속에서 마리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지다 이내 사그라진다. 잠시 후, 나그네 방에서 눈을 뜬 마리는 벌떡 일어나 복숭아나무가 있는 곳으로 달음질쳤다. 나무머리에 가득 피어있던 복사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복숭아나무도 검게 죽어있었다.


“수호야!”

“복실아!”

“카카야!”


미친 사람처럼 주막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마리에게 그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꼬리를 흔들며 다리에서 매달리는 카카도. 뾰로통한 입술을 내밀고 시큰둥하게 다가오는 복실이도. 따뜻한 말로 위로하는 수호도. 빈 주막 안에는 마리의 애타는 음성만이 메아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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