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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주양 Aug 29. 2024

1. 너무 지독해 내 사랑은(하)

꽃이 피면 오세요, (부제: 안녕 나의 과거. 가끔 들를게)

 the last story  연두색 플라스틱이 손에 들어오는 날, 보현에게 제일 먼저 안겨줄 것이다. 높아진 등급을 그에게 당당하게 알릴 것이다.  ‘기다려라! 정보현.’   

 

1. 너무 지독해 내 사랑은 (하)


 보현은 마리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걸까? 두려울 만큼 사랑을 하고 있다. 보현으로 가득 찬 그녀의 마음은 조금의 여백도 없다. 그와 함께 있을 땐 웃었고 혼자 있을 땐 울었다. 뜨거운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덜 사랑하려 노력해 본 적도 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실패했다. 오히려 보현은 생명을 주는 바다고 자신은 그 안에 사는 물고기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을 뿐이다. 


 리는 빠르게 타자를 굴리며 보현과의 추억을 회상한다. 8년 전, 재수 끝에 외곽에 있는 전문대에 턱걸이로 들어간 마리는 금세 친해진 동기 은수와 전시회를 갔다. 생애 첫 전시회. 어른이 된 것 같은 뿌듯함. 디지털카메라를 품에 안고 아파트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기억. 활기찬 대학로 거리와 기분 좋은 바람. 마로니에공원을 지나 하얀 벽돌이 세련된 건물. 진한 잉크 냄새.


 그날의 향기와 느꼈던 작은 흥분까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지나간 것들이 선명해질수록 가슴 한편은 뻐근해진다.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은데 한 뼘도 닿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와의 추억은 거리에 꽃처럼 쌓였는데 세월은 찰나에 스쳐가는 봄날 같다. 지나간 모든 것들이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다.


“상담전화 여세요.”


 박영주의 무미건조한 음성에 맞춰 벨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다. 마리는 비장한 얼굴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모니터 속 전화기 모양을 클릭한다.


‘반드시 플라스틱을 얻으리라!’


 속으로 되뇌며 수없이 연습한 스마일 입술로, 담대히 지옥의 문을 연다.


“최선으로 모십니다. 아르미보 이마리입니다.”

“장미크림 한번 쓰고 얼굴 뒤집어졌거든요?”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결? 무릎이라고 끓을 거?”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은 좀 어떠신지요. 혹시 병원을 다녀오셨다면 진단서나 소견서를 보내주시면..”

“야! 너 사람 놀리니? 진단서까지 끓으라고? 내가 거짓말하는 거니? 너 필요 없고 윗사람 바꿔!”


 매뉴얼대로 진상고객을 응대하며 보현을 떠올린다. 수화기 너머 악다구니에도 유체이탈을 하는 것처럼 육체와 정신을 따로 놀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영혼 없는 사과를 거듭하며 보현을 처음 만난 그 시간으로 필름을 되감는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던 전시장 안. 군중을 따라 오른쪽 벽면부터 왼쪽방향으로 옮기던 어색한 걸음. 난해한 사진들을 대충 훑어보면서 코너 끝에 다다랐을 때, 까만 밤하늘에 별이 촘촘히 수놓아진 사진에 시선이 머물렀다. 순간,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누워있는 것 같았다. 때마침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절묘한 음악이 흘러나왔고 짜인 각본처럼 보현이 등장했다.


“인사해. 고딩친구 정보현, 대학동기 이마리.”


 은수의 소개에 보현은 마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보현! 마리 얼굴 구멍 나겠다.”


 그의 노골적인 관심이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좋았다.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보현의 눈은 온통 마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날 그에게 먼저 연락이 왔고 종각 역에서 만나 인사동거리를 걸어 다녔다. 벚꽃이 눈처럼 쌓여서 발끝으로 툭 차면 공중으로 올라가 잠시 멈췄다가, 느린 그네를 타듯 천천히 내려왔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 남녀는 인사동 골목을 누비다가 이층 한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카페에서 유자가 사각사각 씹히는 음료를 마셨고 이국적인 식당에서 카레를 먹었다. 그는 마리에게 호감을 표했고. 보현의 감정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아름다워졌다.


 이년 뒤 보현은 군의 입대했다가 제대했고 마리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런 형편임에도 그녀는 결혼이 하고 싶었고 보현은 현실적인 문제로 싫다 했다. 마리는 가난해도 괜찮았지만 보현은 아니었다. 날 사랑하기는 할까? 마리의 의심과 원망은 연인을 자주 다투게 만들었다. 만날 때마다 마리의 서운함이 꾸역꾸역 터져 나왔다.


“나 졸업도 못 했어.”

“곧 취업될 거야. 네 학비도 책임질게.”


 보현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인은 오랜 대화 끝에 결혼대신 동거를 선택했다. 일주일 뒤, 그들은 함께 살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 매미가 마지막 힘을 다해 우는, 여름 끝자락은 가만히 있으면 더웠지만 바람이 불면 시원했다. 부동산 사장님을 따라 마포 언덕을 한참 올라가자, 장미 넝쿨이 울타리 져있는 담 낮은 오래된 한옥집들이 나왔다. 집집마다 감나무와 은행나무가 흔하게 심겨 있었다.


“밥 짓는 냄새가 온 동네에 가득하겠어. 전생에라도 이곳에 살았던 것 같아.”


 보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작은 평상이 덩그마니 놓인 구멍가게를 지나자 가파른 계단이 보였다. 앞서 계단을 오르던 부동산 사장님은 비 오듯 땀을 쏟아냈다.


“언덕이 꽤 가파르네요?”

“산을 깎아서 만든 마을이니까요”

“저기 언덕 꼭대기는 사람이 살아요?”


 보현이 기겁을 하며 묻자, 부동산 사장님이 목을 젖히며 언덕의 가장 높은 곳을 올려보았다.


“토박이 할머니 말로는 마을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다는데. 말도 안 되지, 조선시대 전부터 있었다는 건데..”


 보현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된 기와집 옆에 고목나무라니.. 귀신 나올 것 같아. 어쨌든 저기는 산책코스에서 열외!”

“밑에 한강공원이 있는데 저런 흉가로 산책을 갑니까? 저기는 언덕에서도 제일 꼭대기이에요. 계단도 가파르고. 눈 오는 날 올라갔다가는 고립됩니다.”


 혀를 끌끌 차는 사장님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청록색 철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수돗가가 보였다. 오른쪽으로는 앵두나무, 봉숭아꽃이 심겨있고 한편에는 작은 창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댓돌에 올라 물방울문양에 얇은 유리문으로 된 미닫이문을 열어보니, 정면에는 싱크대와 작은 찬장이 달려있고 작은 마루를 중심으로 두 개의 방이 마주 보고 있었다. 마당으로 나있는 쪽마루에 벌러덩 누운 보현이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 집이다!”


 보현의 말에 마리의 가슴이 뛰었다. 강남에 사는 집주인은 재개발이 될 때까지 비워놓길 원했고. 집주인의 아내는 싼값이어도 좋으니 세를 놓길 바랐다. 언덕의 집은 재개발 예정지라 세가 잘 나가지 않는다며 부동산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개발되려면 한참 걸리니까 마음 놓고 살아요.”


 집주인 아내의 바람과. 사장님의 간절함 그리고 연인의 설렘이 삼박자를 이루는 최상의 집이었다. 까치발을 세우면 담벼락 너머로 한강이 내려다이는 그 집에서. 어떤 날은 보고만 있어도 좋을 만큼 사랑했고. 또 어떤 날은 금방이라도 헤어질 것처럼 싸웠다. 햇살이 예쁘게 비추면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며 사진을 찍었고, 해가 긴 계절에는 한강 너머로 붉게 저무는 노을을 보며 감탄했다. 그들의 세계는 그 언덕에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모든 것이 완벽하다. 그러니 아픈 말로 이별을 말해도.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 말해도. 한 달이 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지겨우니 그만하라며 소리를 질러도. 언덕 중턱에 그 집이 있는 한, 우리의 세계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마리 님 내 자리로!]


 정지혜가 보낸 메신저가 사납게 깜빡인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쥐어 잡을까? 무슨 일이던 눈물 한번 훔치고 보현을 떠올려야지. 그의 손을 그의 눈을 그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만지고 품에 안아야지. 그리고 웃어야지.    



 퇴근하는 발걸음이 무겁다. 지하철 계단을 힘겹게 올라와 역사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생수 한 병을 집어 계산을 하고. 간신히 유리문을 밀고 나와 파라솔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열리지 않는 병뚜껑과 씨름을 한다. 시선은 정류장에서 내리는 사람들에게 고정한 채로. 보현이 군중 틈 사이로 뿅 하고 나타날지 모르니. 겨우 열린 생수병을 입에 쑤셔 넣고 벌컥벌컥 들이켠다. 한 병을 다 마셨는데도 갈증이 사라지질 않는다. 마른 입을 쩝쩝 다시며 편의점 안을 들여다보지만 쉽게 몸을 일으키진 않는다. 문을 열고 생수를 집어서 계산대에 내밀어야 하는 일련의 일들이 엄두가 나질 않기 때문이다.


‘너를 사랑하는 일 외에 모든 것들은 나를 힘들게 한다. 아니 너를 사랑해서 힘이 드는 건지도. 사랑을 하고 있는데 행복하지 않다. 조금 덜 사랑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사실 많이 생각했다. 너에게 매력 있는 여자로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건 모두 너를 조금만 덜 사랑하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지옥 같은 회사를 꼬박꼬박 출근하는 것. 싫은 일들을 처리하는 것. 죽이고 싶은 사람을 견뎌내는 것. 얼굴이 똥통에 쳐 박히는 굴욕을 감내하는 것. 지금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해내고 있고. 얼마든지 더 할 각오도 되어 있다. 정보현 너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너를 계속 사랑할 수만 있다면. 행복 따위 없어도 된다.’


 마리는 15번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애타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언덕으로 발을 돌린다. 언덕 초입부터 숨이 가빠와 걸음을 멈췄다. 호흡을 짧게 내쉬며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보현에게서 온 연락이 없는지 살펴본다. 광고 문자를 삭제하면서 울컥하는 마음을 쓸어내린다.


 언덕을 사납게 내려가는 오토바이 굉음에 들고 있던 생수병을 떨어뜨렸다. 계단 밑으로 굴러가는 생수병을 물끄러미 보다가 언덕 아래 반짝이는 한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손에 쥔 휴대폰이 진동한다. 마리의 눈빛이 강물처럼 흔들린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발신인을 확인한다. 마리의 반짝이던 눈빛은 급격히 빛을 잃는다.


“마리야..”

“미영... 집에 잘 들어갔어?”

“미안하다는 말부터 먼저 할게...”


 전화기 너머 미영의 음성은 사뭇 심각하다.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겠다는 말이라 짐작했다. 그러면 마리는 바로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데 끌고 와서 미안하다 용서를 구해야지,  말들을 준비하며 입술을 반쯤 열었다.


“지혜님이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줬어.”

?”

“지혜님이랑 술 한 잔 했어.”


 예상치 못한 말에 어리둥절한 마리는 할 말을 잃고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며칠 전부터 인사를 하더라고. 너 연차 쓴 날 지혜님이 챙겨줘서 점심도 같이 먹었어. 보니까 웃긴 구석이 많더라고. 그런데 너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괜찮아! 나 때문에 너까지 미워하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너 좋게 봤나 봐. 다행이야.”

미안해 마리야.”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정말 다행이야.”

“정말? 나 지혜언니랑 친하게 지내도 되는 거지?


 괜찮다고 했지만, 마리의 상기된 얼굴묘하게 일그러진다.


“지혜언니가 주말에 만나자고 했어. 유머코드가 맞는 거야. 나랑 비슷한 구석도 은근히 많아.”

“그래? 지혜님이 유머러스하지.”


 마리는 없는 말로 미영비위를 맞추며 먼발치를 바라봤다. 이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허망함? 질투? 배신감?


'나는 그랬어. 너에게 조금이라도 위해를 끼친 사람이면 너보다 더 싫어해줬어. 그녀가 내게 얼마나 상처를 줬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녀를 좋은 사람이라고.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칭찬을 니...'


 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이런 말들을 목밑으로 밀어냈다.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던 마리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그때 그 사건이 선명하게 떠올라 한쪽 눈을 파르르 떨었다.


 작년 겨울의 이다. 사내 게시판에 서은진과 마리가 나란히 찍힌 사진이 올라왔는. 서은진은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sns에 올렸고, 사진 밑에는 이런 악플달렸다.


[정말 예쁘다. 우리 은진이만! 그 옆은? 역시 세월은 못 속여?]

[악! 나 영주님 말 이해했음. 크크크크크]


 정지혜와 박영주 그들은 온오프를 가리지 않았다.


“영주언니 겪어보니 사람 좋더라. 오늘은 영주언니 남자 친구도 왔거든? 그 형부가 진짜 재밌는 거야! 웃느라 배 찢어지는 줄!


 그런데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들을 침까지 튀겨가며 칭찬하고 있다. 그녀들이 던진 돌에는 악의가 없다, 변호까지 하면서... 커피 열 잔은 마신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린다.


“그런데 성하도 알바한 적 있어?”

작년 여름 이벤트 때 짧게 삼일 정도?

“영주언니가 성하는 마리랑 친구 안 같아 보인데.”

“그게 무슨..”


 순간 등에서 소름이 쫙 올라오면서 몸 전체를 돌고 있는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쥐가 나는 다리를 접었다 피면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성하는 카리스마가 있지. 나는 좀  개념 없이 보는 것 같아.. 뭘 해도 미워 보이나 봐...”

“에이 오해하지 마. 지혜언니나 영주언니 좋은 사람들이야. 네가 마음을 좀 열어봐.”


 간신히 미영의 전화를 끊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서 눈물과 땀에 젖은 눅눅한 옷을 벗어던지고 싶다. 그전에 냉장고 문을 열어 시원한 물을 숨도 쉬지 않고 마시고 싶다. 그렇게 힘을 좀 얻으면 불 꺼진 마당에서 차가운 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끼얹고 싶다. 올해 봄은 꽃이 채 피기도 전에 저물었고 갑자기 추워졌다가 한 여름처럼 후덥지근하다. 그와 함께 하지 못한 봄날이 아쉽게 흘러간다. 보현아, 사랑해... 마리는 희미한 말을 허공에 내뱉는다. 듣는 이 없이 흩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    




모든 계절이 온통 그였을 당신에게.
오늘도, 꽃이 피면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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