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2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이를 먹는다는 것

모두에게 공평하게 공짜로 주어지는 유일한 기회

by 오늘 Feb 21. 2025

제 기억엔 적어도 25살까지는 나이를 먹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반 오십'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으로 너무 빨리 이룬 것 없이 나이를 먹었다고 한탄하며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옆 테이블에 지금의 내가 앉아 있었다면, 코웃음을 치면서 "좋을 때다!"라고 부러워했을 텐데.

아마 그 당시에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돈을 내고'다니는 조직이 아니라, '돈을 받고'다니는 조직에 스스로 손을 들고 뽑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다렸을 때니까요.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의 평가가치가 점점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20살에 입시의 쓴 맛을 봐서 '고작' 1년 남들보다 출발이 늦어졌다는 자격지심이 깊이 자리했던 것도 한몫했겠지요. 


그러나 막상 그토록 바라던 취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너무 미물같이 느껴졌습니다.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서툴기 짝이 없고, 뭘 하든 어색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 같았어요. 나의 첫 직장은 온라인 커머스 영업부서, 나는 그중에서도 뷰티팀의 MD(Merchandiser)였습니다. 상품을 소싱하고 기획하는 직업, 다양한 화장품 브랜드사와 벤더사들과 미팅을 하고, 경쟁력 있는 상품을 타사 보다 먼저 매력적인 조건으로 소싱해 오는 일이 나의 업이었습니다. 취업 전에는 어디 가서 기가 약하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는데, 상대적으로나 절대적으로나 부족했던 나의 업력은 나를 자꾸 기죽게 했습니다. 사람은 왜 간절할수록 초라해지는지, 그 잔인한 법칙 앞에 간절히 잘 해내고 싶은 이토록 가련한 사회초년생이라니. 나름 간절함을 숨기고 프로페셔널하게 네고를 하고,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마무리 멘트까지 짐짓 자연스럽게 해내고, 엘리베이터까지 협력사 대표님을 안내하는 비즈니스 매너까지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의 흥미로운 미소와 함께 나오는 어쩌면 악의 없을 한 마디는 그 완벽함에 균열을 주곤 했습니다. 


"MD님은 몇 살이세요, 굉장히 어려 보이시는데."


지금이라면 신이 나서 "어머나 정말요! 몇 살 같아 보이는데요?"라면서 진심으로 기뻐서 감사인사를 건넸겠으나,

"생각보다 꽤 먹었어요, 제가 또 동안이에요."라는 냉랭한 대답으로 에둘러 말하면서도 괜스레 마음이 불편한 것은 아마도 어린 마음에 왠지 뭔가 약점을 들켜버린 것 같고, 이 팽팽한 프로들의 세계에서 져버린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을 겁니다.


'어려 보인다', '어린 분이 열심히 하시네요.' 등등...

그 무렵 들었던 그런 말들은 상대의 악의가 없었다더라도, 나에게는 마치 '애송이네요.', '프로답지 못 하네.', '어려서 뭘 모르는구먼.'이라고 왜곡되어 전달되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린 티가 나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 MD는 숫자로 말한다고 나이가 아니라 실적으로 증명하고자 자정이 넘도록 야근을 해서라도 목표한 바를 해내고 마는 일. 하지만 내가 열심히 공부하고 연기한다고 해도 시간이 주는 노련함과 익숙함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은 얻을 수 없었을 겁니다. 거의 아빠 뻘이었던 협력사 대표님, 부장님 대부분은 그걸 알면서도 열심히 하는 딸 같은 내 모습에 정중하게 대우해 주셨을 뿐.


그때는 이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나도 얼른 익숙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 비록 회사는 그만두었지만, 다시 재취업을 한다고 해도 이제는 누가 봐도 어려 보이는 MD가 되기에는 먼 강을 건너버린, '어려 보인다'는 칭찬을 듣더라도 그 의미가 '앳된'의 의미는 절대 아닐 겁니다. 원하던 대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원하던 여유도 얻었고, 나이도 먹었습니다. 다행이지요, 나이는 노력하지 않아도 먹어진다는 것이.


그때처럼 나이를 빨리 먹고 싶지는 않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좋습니다.


나이가 늘어난다는 표현은 흔히들 '나이를 먹는다'라고 합니다. 마치 음식처럼요. 음식은 먹고 나면 살도 오르고, 키도 크는 등 성장에 기여합니다. 나이도 그렇습니다. 버텨온 시간을 통해 어쨌거나 성장하게 됩니다. 자연스러움, 노련함, 의연함, 여유로움 같은 것들이 살처럼 내 구석구석 붙습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으면 혈색이 좋아지고 살성이 탄탄해지는 것처럼, 건강하고 온전한 시간을 보내면 정직하게 그 시간이 어딘가에 근사하게 자리 잡습니다. 그래서 해가 거듭할수록 근사한 나이를 먹고 싶어서 노력하게 됩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나이인데 이왕이면 근사하게 잘 차려 먹고 싶거든요. 어차피 모두 나이를 먹습니다. 앳됨과 젊음을 평생 유지할 수 없다면 나이를 잘 먹는 것도 방법이지요. 


올해도 벌써 공짜로 새 나이를 먹은 지 3개월 차를 향해 갑니다. 나는 먹은 나이를 잘 소화시키고 있는지 가만히 돌아봅니다. 사실 올해로 몇 개째 먹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속된 말로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냐'는 말은 듣지 않게 잘 먹고 있는 거 같긴 합니다. 나이에도 기초대사량이 있는데, 여태 다른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숨이 헐떡이고 어지러웠던 적도 있고 먹은 나이에 비해 게으름을 부리고 움직이지 않아 퍼졌던 적도 있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나니 이제야 내 나이에 맞는 속도가 뭔지, 어떻게 주어진 나이를 소화시켜야 할지 노하우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썩 근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25세의 그 술집에서 반 오십 타령을 하던 내 옆테이블에 앉게 된다면 그 당시 유행하던 순하리 과일향 소주를 한 병 사주면서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꼭 나쁜 일은 아니라고. 반 오십이 아니라 찐오십이 되어도, 잘 먹은 나이는 꽤 근사하게 자리 잡는다고 말이죠.



금요일 연재
이전 17화 외모지상주의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