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새롭고 낭만적인.
짜임새가 성긴 여행을 좋아합니다.
촘촘히 짜인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고 미리 검색해서 계획해 둔 메뉴를 자연스럽게 주문하고 유명한 랜드마크는 모두 다 돌아봐야 하는 여행도 나쁘지 않지만, 아마도 대부분 그런 여행에서 계획대로 되지 않았던 기억이 많았던 탓인지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계획대로 안되면 상처받잖아요.
물론, 저도 여행일정은 세웁니다. 하지만 이동 동선이나 관광명소 방문을 계획할 순 있지만 그날의 날씨나, 교통상황이나, 사람마다 다른 입맛 같은 건 내가 계획할 수 없습니다. 여행지의 어마어마한 맛집에 갔는데 웨이팅이 2시간이라면, 웨이팅을 해도 하지 않아도 계획이 무너지기 마련인데 내가 계획한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리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여행마저 그렇다면 일이랑 다를게 뭔가요?
생각해 보니, 아마도 내게 여행은 숨 쉴 구멍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짜임이 성기어야 틈이 있고 그래야 숨 쉬기 좋잖아요?
그래서 저는 여행 결정도, 여행 계획도 오랜 시간을 두고 정하지 않습니다. 잠이 안 오는 새벽에 혼자 SNS를 들여다보다가 알고리즘에 이끌려 뜬 여행 포스팅에, 주말에 갑자기 일어나 다음 주 주말에는 집순이 탈출하자는 영감이 퍼뜩 들어서, 그냥 갑자기 여행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에 갑자기 결정하곤 합니다. 우선 목적지가 정해지고, 숙소만 있다면 우선 떠날 준비는 다 된 것 아니겠어요?
아마 나의 이런 무계획이 계획인 여행은 엄마와의 첫 일본여행이 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때는 약 10년 전, 엄마의 생신은 꽃 피는 춘삼월, 특별한 생일을 선물하고 싶어서 오사카 벚꽃 여행을 계획했었습니다. 엄마와 함께 가는 첫 해외인지라 어찌나 긴장이 되었는지, 생선과 기름진 것을 싫어하는 엄마의 식성에 맞춰 현지 식당맛집을 찾아보고, 이동하는 교통의 환승시간까지 꼼꼼히 체크해서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숙소까지 가는 길부터 꼬였습니다. 무거운 캐리어에, 관절이 아파 힘들어하는 엄마의 표정까지 어찌나 마음이 무겁던지. 여행 전 수없이 검색한 정보인데 왜 이렇게 같은 길을 뱅뱅 도는 느낌인지. 검색은 많이 했지만 내가 길치라는 사실은 미처 인식 못한 탓이었습니다. 저녁식사로 알아본 식당은 길을 헤매느라 고단했던 엄마가 숙소에서 좀 쉬다가 나가자고 하시는 바람에 갈 시간을 놓쳤고 연속으로 틀어지는 계획에 여행은 즐겁기보다 죄책감만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잠들고 역시나 손에서 구글맵을 놓지 못하고 흐드러진 벚꽃은 보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다니다가, 일본 버스 한 번 타보자는 엄마의 고집으로 한 번 더 여행계획 경로이탈을 한 그때였습니다. 만원 버스에서 겨우 자리를 잡아 엄마를 앉히고 몇 정거장이나 갔을까, 낯선 외국에서 출퇴근 지옥을 경험하는 듯한 불쾌감에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엄마가 한국말로 '여기, 여기로 오세요'하면서 의자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아니, 엄마 여기 일본이야. 겨우 자리 잡았는데 왜 일어나서 대뜸 한국말을 하고 그래! 참을 인(忍) 대신 미간에 내 천(川) 자를 새기며 짜증을 내려는데 백발의 일본 할머니가 인자한 웃음으로 엄마 손을 잡고 의자에 앉고 계셨습니다. 일본어로 고맙다며 한국인이냐고 묻는 할머니에게 대학교 때 교양 일본어로 발 담갔던 얕은 일본어 실력으로 한국인이라고 대답하고. 엄마냐고 묻는 질문에 '하이, 카노죠와 와따시노 하하데쓰. 쿄우와 카노조노 탄조비데쓰.'(네, 그녀는 우리 엄마예요. 오늘은 그녀의 생일입니다)라고 TMI를 던진 후, 뿌듯한 마음에 창문을 보면서 목적지로 향하던 때였습니다.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몇 번이고 엄마 얼굴을 쳐다보며 뭔가 끄적이던 할머니가 우리 엄마의 손등을 톡톡 친 것은. 할머니 손에 들린 종이에는 엄마의 얼굴을 똑 닮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고 서툰 일본어로 아리가또를 읊조리는 엄마 얼굴이 꽤나 소녀 같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엄마는 그날 그 버스의 할머니 이야기를 할 때면 행복한 얼굴이 되곤 해요.
계획에 없었던 버스 탑승이, 예상치 못했던 자리양보가.
엄마의 첫 일본여행을 이토록 낭만적으로 만들 줄이야.
그때부터 저는 목적지와 숙소 외에는 큰 계획을 세우지 않고 여행을 계획합니다.
몇 년 전 방콕 여행에서 들린 짜투짝 시장에서 한국인이 아무도 없는 그냥 노포식당에 들어서 그림이 그럴싸 한 국수를 시키고 앉아있는데 태국인 사장님이 웃으며 우리 부부에게 바나나 튀김 두 개를 내밀었습니다. 세상에, 바나나 튀김이요? 아무리 튀기면 신발도 맛있다지만 바나나를 튀긴다니, 뜨거운 바나나라니! 하지만 낯선 외국인을 향한 친절은 제 아무리 뜨거운 바나나라도 감사히 받아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한 입 베어문 순간, 세상에 이런 맛있는 디저트가 또 있나 싶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정신을 차려보니 태국의 그 땡볕더위에 한 손에는 바나나 튀김 한 봉투가 들려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태국에서 먹었던 것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그 바나나 튀김이라니.
무계획이 계획인 여행은 그렇습니다.
계획하지 못했던 경로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새롭고 낭만적인.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생각보다 잔상도 깊게 남는 것 같습니다. 그 여행의 좋은 기억은 다 계획 없던 곳에서 나왔던 듯합니다.
감동적이고 인상 깊은 것들은 대부분 서프라이즈인 것처럼,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마주치는 것들은 더 오래 기억나기 마련입니다. 우연히 들어선 골목에서 발견한 예쁜 소품샵이나, 사람들이 많아서 돌아가려고 들어선 길이 지름길이라거나, 맛집에 웨이팅이 길어서 옆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서 받은 서비스 디저트가 별미라거나 그런 사소하고 즐거웠던 감정들 때문에요.
엄마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일본 버스 안에서 그려진 초상화라거나,
더위에 취약한 남편이 유난히 맛있어했던 그 더운 방콕에서의 바나나 튀김이라거나,
무계획이 계획인 여행은 어디서 무엇을 만날지 몰라 더 설레는 바람에
저는 도무지 여행계획은 못 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