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 국어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이 아마 내가 처음으로 내 용돈을 가지고 스스로 산 책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한두 권씩 샀다. 옷이나 다른 걸 살 때는 돈이 아까웠지만, 책을 사는 데에는 돈이 아깝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 서점에 가서 책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서점에서 나는 새 책의 빳빳한 종이 냄새도 좋았다.
<외딴방>을 읽고 신경숙 작가의 팬이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을까 감탄하며, 그녀의 책을 거의 다 사서 읽었다. 꽤 오랫동안 그녀의 팬이었던 나는 표절 논란이 있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이니까 나도 모르게 기억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던 문장들이 내가 생각해서 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너무 많았고, 너무 똑같았다. 그녀의 해명은 나에게 아쉬움만 남았다. 시인도 사과도 없이 애매모호하게 그 일은 마무리되었다.
그때부터 한동안 책을 읽는 것에도, 사는 것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녀의 책을 정말 좋아하고 감동하며 소중하게 읽었던 시간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것처럼 허탈하고 씁쓸했다. 그래서 일부러 책을 멀리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그리 큰일인가 싶지만 그때는 어렸던 건지, 순수했던 건지 상처가 꽤 커서 나름대로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책에 대한 애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영상으로 보다 것보다 문자로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나는, 드라마나 영화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책이 주는 깊이와 감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는 육아서를 자주 읽게 되었다. 작고 연약한 아이는 온전히 나만을 의지하는데, 엄마가 된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서툴렀다. 좋은 육아서는 많았고 그중에는 도움이 되는 것도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내 아이는 책에서 말하는 기준대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어쨌든 육아서를 기회 삼아 다시 책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고, 독서의 즐거움을 되찾게 되었다.
슬금슬금 다시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생기고, 여전히 좋은 책을 읽으면 금세 감동하고, 쉽게 사랑에 빠진다. 이제는 실연에 상처받을 나이는 아니니 마음껏 좋아하고 즐기기로 했다.
예전에는 책을 사서 내 책장에 꽂아 놓는 것이 좋았다. 내 책장에 보기 좋게 꽂혀있는 책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하고 흡족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을수록 나 혼자만의 만족이고 부질없는 소유욕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소유욕과 구매욕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무엇을 사기 전에 나중에 이것을 버릴 때를 먼저 생각해 본다. 그러면 다 짐 같이 느껴진다. 최대한 짐을 줄이고 가볍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생각만 이렇게 하고 실천은 잘 못하지만. 사서 딱 한 번 읽고 다시 펴보지 않은 책들도 많다. 책장에 말고 내 머리와 가슴속에 두어야 진정한 내 것이 되는 것인데 기억이 짧아 금방 잊어버리고 만다.
요즘은 동네마다 도서관도 잘 되어 있고 독서 앱을 통해서도 책을 쉽게 볼 수 있어 나에게는 참 다행이다.
출판 시장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나라도 책을 사야 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하루가 머다 하고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 내가 읽는 속도로는 도저히 그것을 따라갈 수 없다. 책을 사는 사람보다 책을 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고 하는 세상에 읽고 싶은 책을 다 살 수도 없다. 어떤 때는 이 수많은 책들 중에 어떤 책을 사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한때는 동네 서점들이 다 문을 닫고 대형서점만 겨우 살아남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즘은 전국 각지에 방문하고픈 크고 작은 독립서점들이 눈에 띈다. 관심 분야 위주로 추천해 주는 소셜미디어의 영향도 있고,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수상도 영향이 있겠지만, 책을 좋아하는 누군가는 꾸준히 책을 만들고, 사고, 읽고 있다는 게 반갑고 든든하다. 내가 관심이 없었고 잘 몰랐을 뿐이었다.
여전히 서점에 가고 책을 사는 건 나를 설레게 하고 행복하게 하지만 꼭 소장하고 싶은 책만 사려고 한다. 대신 도서관을 자주 이용한다. 작가님의 이름만으로도 믿고 보는 책들도 물론 있지만, 때로는 아무거나 끌리는 책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러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글에 빠지면, 신세계를 발견한 듯 기쁘다. 베스트셀러 작가님들의 책은 나 말고도 사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님들, 이제야 내가 발견하게 된 작가님들, 새롭게 시작하는 작가님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그분들의 책을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다 떠나서 책을 소유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통해 내가 얻는 경험, 사유, 그리고 깨달음 아닐까. 소유에 목적을 두는 독서가 아니라, 나를 변화시키는데 목적을 두는 독서를 앞으로도 계속해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