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이 형편없는 편이다. 사람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너무 좋다고 감탄을 연발하며 다음에 또 오겠노라 다짐했던 식당도, 카페도, 여행지도 다녀오고 나면 어디였는지 기억나지 않아 다시 가지 못한다. 워낙에 말솜씨가 없는 편인데, 요즘에는 흔히 쓰는 단어들조차 잘 떠오르지 않아 점점 더 말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꼭 기억해야 할 것들 외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기능이 떨어지는 나의 뇌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한 나만의 방법이다. 쓸데없는 것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려다 과부하가 걸려, 정작 중요한 것을 잊게 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문장마다 감동과 희열을 느끼며 읽었던 책도, 눈물 콧물 다 빼며 주인공에 감정이입해 읽었던 책도, 너무 재밌어서 펼친 자리에서 후루룩 읽어버렸던 책도 놀랄 만큼 순식간에 내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다. 정말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책을 중간쯤 읽다가 내용이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내용의 다른 책인가 싶어 계속 읽다가 마지막장에 이르러서야 예전에 분명히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공의 성격과 줄거리, 결말까지 모두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억력으로 보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리 제목과 표지를 뜯어보아도 그 책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내용의 소설이라 처음 읽었을 때도 분명 내 뇌리에 박혔을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생각이 나질 않다니, 내 기억의 어느 구간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 일은 나에게 꽤 큰 충격이었다. 혹시 치매 초기 증상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내 기억을 조금이라도 연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 그래서 생각한 것이 ‘독서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은 부분에 인덱스를 붙이고, 다 읽은 후엔 표지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사진과 함께 좋았던 문구들을 내 소셜미디어에 기록한다. 팔로워를 늘리려는 것도, 서평 이벤트에 참여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 기억의 연장을 위한, 나만의 기록이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니 확실히 기억이 길어졌다. 내용 전체를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과 좋았던 문장들은 기억에 남았다. 그러다가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기로 했다. 작가의 문장뿐 아니라 내가 느낀 감정과 생각도 조금씩 적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쓰고 보니 이것이 어릴 때 그렇게도 싫어했던 ‘독후감’이었다.
그땐 선생님들이 자주 독후감 숙제를 내주셨다. 독후감 공책도 따로 있었다. 요즘엔 예쁘고 감성적인 독서기록 노트도 많지만, 그 시절 독후감 공책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책 읽는 건 좋아했지만, 독후감을 쓰려고 공책을 펴면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막막해지곤 했다. 책의 앞이나 뒷부분에 적힌 책 소개글이나 추천서를 베끼거나, 책 속 문장을 짜깁기해 독후감이랍시고 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문장은 늘 “나는 이 책을 읽고 어찌해야겠다고 다짐했다.”로 끝맺었다.
그때부터 책을 읽은 후의 내 생각과 감정들을 잘 기록해 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다면 내 기억력이 조금 더 나아졌을지도, 지금보다는 글을 더 잘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타깝지만 이제부터라도 꾸준히 쓰는 수밖에.
잊는다는 건 인간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면 그 또한 괴로운 일일테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겠지만, 책을 읽으며 느끼는 다양한 감정과 그 진폭만큼은 조금 더 오래 간직하고 싶다. 평소에 무던하고 감정의 동요가 크지 않은 나에게, 책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감정의 굴곡과 높낮이는 특별하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를 이해하고 타인을 공감하는 데 있어, 이런 넓고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향적이고 표현이 서툰 데다 기억력도 좋지 않아 금방 잊어버리는 나이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에게 다정한 관심과 따뜻한 공감을 잃고 싶지 않다. 조금 더 오래 기억하고,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꾸준히 독서 기록을 남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