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도착하니 지금까지 방문했던 도시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역시 수도는 수도인가 보다. 아토차역을 빠져나와 거리로 나서니 넓은 대로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었고 한눈에 대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찾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버스 종류와 노선에 따라 정류장이 여러 군데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정류장마다 안내시스템이 잘 되어있어서 다음에 올 버스 번호와 예상 도착 시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트래블카드로도 버스비를 지불할 수 있고 버스 내부는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이용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우리가 탈 버스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어 정류장에 서 있는데 저쪽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곱게 땋은, 귀엽고 이쁘장한 여자 아이였다.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아이가 갑자기 두 손을 들어 눈을 찢는 동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 옆에 있던 동생을 쳐다보았다. 동생도 그 아이의 모습을 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쟤 봤어?’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간혹 이야기로만 듣던 인종차별 제스처를, 그것도 저렇게 어린아이에게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는데 막상 내가 겪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기분이 나빴다. 아이의 엄마는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느라 상황을 알지 못했고, 우리 엄마도 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우리는 단호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아이를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검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런 행동은 옳지 않다는 것을 말없이, 그렇지만 분명하게 전달했다.
그 아이라고 무엇을 알고 그렇게 했을까.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어디선가 보았던 행동을 그저 호기심으로, 악의 없이 따라 했을 것이다. 그때 마침, 그 모녀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고 아이는 엄마와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제일 뒷좌석에 앉은 아이는 우리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아이도 놀랐을 것이다. 우리의 싸늘한 표정 속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테니까.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 잘못인 줄 모르고 그랬는데 어른들에게 혼쭐이 난 적, 일부러 못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웠던 순간. 아마 그 아이도 그랬을 것이다.
짧은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엄마 옆으로 몸을 숨겼다가 버스가 떠나기 전 우리에게 살며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제야 나와 동생도 당황스럽고 놀랐던 마음이 진정되며 다시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마드리드 거리에는 티셔츠나 선글라스, 잡다한 기념품들을 파는 흑인 상인들이 곳곳에 보였다. 네 구석에 끈을 매단 돗자리에 물건들을 펼쳐두고 장사를 하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계속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경찰이 나타나면 빠르게 끈을 모아 돗자리를 어깨에 메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단속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이 불법체류자이거나 정식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취약계층의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불편해하는 시선이 있는 반면, 이들이 합법적인 노동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움직임도 일부 존재한다고 한다.
물론 정당한 절차 없이 남의 나라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넘을 수 없는 사회의 벽,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에 그들은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도심의 거리에서 두리번거리던 그들의 모습이 겹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리가 버스 정류장에서 겪었던 차별도, 거리의 상인들이 삶에서 마주하는 차별도 서로를 구분하고, 선을 그으며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차별을 하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당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이것만큼 불쾌한 것이 또 없었다. 비록 우리가 겪은 일은 철없는 아이에 의한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지만, 마드리드 뿐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서는 지금도 크고 작은 차별이 행해지고 있겠지? 나 또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거나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어릴 적 처음으로 교과서에서 접했던 '지구촌'이라는 말이 낯설고 먼 이야기처럼 들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은 말 그대로 지구의 모든 나라들이 촘촘히 연결된 하나의 사회가 되었다. 전 세계의 소식을 앉은자리에서 몇 시간 만에 접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지구상의 어느 나라든지 갈 수 있다. 나만 보더라도, 살면서 전혀 와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스페인, 마드리드에 이렇게 와있지 않은가. 세상은 점점 하나의 마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인종 간, 성별 간, 세대 간의 차별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만났던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의 세상은 조금 더 평등하고 차별 없고 모두에게 공평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출신이나 모습에 따른 물리적, 실질적 차별뿐 아니라 심리적 배제 또한 없는 세상, 누구나 똑같은 ‘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조심스레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