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멩코, 스페인광장, 추로스

by 수정

플라멩코 공연은 저녁 7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공연은 약 1시간 정도 진행되며, 30분 정도 여유 있게 입장해 달라는 안내가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저녁을 먹기로 하고 우리는 호텔 1층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공연장은 그리 크지 않아 무대와 객석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가운데에 단출한 무대가 있고, 그 무대를 둘러싼 세 면에 관객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관객은 주로 관광객이었고, 단체로 관람 온 학생들도 보였다. 공연 전 진행 스태프가 공연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뒤 곧바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출연진은 여자 무용수 한 명, 남자 무용수 한 명, 기타 연주자 한 명,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여성 두 명으로 총 다섯 명이었다. 스페인의 중요한 민속 예술 중 하나인 만큼,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집중하며 공연을 관람하려 노력했다.


노래가 시작되자 공연장 안은 고요해졌다. 노래를 부르는 여성은 옷자락을 부여잡은 채, 몸속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목소리를 끌어올리듯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노래라기보다는 슬픔과 한이 토해져 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공연이 끝나면 탈진이 오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공연 내내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내며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이 교대로 노래를 불러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와 기타 반주에 맞춰 플라멩코를 추는 여성 무용수는 빨간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아래로 갈수록 풍성해지는 프릴 스커트를 입고 등장했다. 여성스러운 의상과 달리 춤은 굉장히 힘이 넘치고 절도 있어 보였다. 우아하고 섬세한 손동작, 강하고 역동적인 발동작, 그리고 심오하고 비장해 보이는 표정이 조화를 이루며 관객들을 압도했다.


처음 접하는 플라멩코 공연이어서 그 정서와 내용을 백 퍼센트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감정의 밀도가 매우 높은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마치 진공 상태에 있다가 탁 풀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플라멩코 공연은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그냥 느껴지는 대로 감정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에 걸친 공연은 기립박수 속에서 마무리되었고, 잠시 사진 촬영 시간이 주어졌다.

공연이 끝나자 허기가 몰려왔다. 오늘은 외식 대신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 와 컵라면과 함께 먹기로 했다. 집에서부터 싸 왔던 컵라면을 며칠째 먹지 못하고 캐리어에 계속 가지고만 다녔기 때문이다. 장도 볼 겸, 저녁 산책도 할 겸 우리는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향했다.

밤에도 세비야의 거리는 온화하고 아름다웠다. 조명을 받은 대성당의 모습은 고아하고도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왕 걷기 시작한 김에 달키비르 강변까지 내려갔다가, 황금의 탑이라 불리는 토레 델 오로도 구경했다. 유람선도 운영하는 듯했지만 시간이 늦어 이미 마감된 상태였다. 내일 아침 강변을 따라 산책하며 다시 한번 풍경을 즐기기로 하고, 마트에 들러 이베리코 하몽과 말린 무화과, 화이트 와인 한 병을 사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한국인의 소울푸드, 뜨거운 라면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키자 온몸에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하루 종일 이만 보 넘게 걸어 조금 힘들었는데, 피로가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와인과 하몽도 찰떡궁합이지만, 라면 국물을 따라올 안주가 있을까. 우리는 깔끔하게 와인 한 병을 비우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아쉽지만 세비야에서의 일정도 1박뿐이었다. 점심 무렵 마드리드로 이동할 예정이라 아침 일찍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사과로 간단히 아침을 대신하고, 어제 잠시 들렀던 강변을 따라 걸으며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들렀던 ‘광장’들은 말만 광장이지 그다지 크지 않은 공간이었는데, 스페인 광장은 규모부터 어마어마했다.


한가운데 분수대를 중심으로 좌우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부채꼴 모양의 광장에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벽마다 스페인의 각 지방을 상징하는 타일 장식이 이어져 있었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이렇게 한가한 스페인 광장을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원 없이 즐겼다. 이제 막 떠오르는 햇빛과 어우러진 광장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360도 파노라마 영상까지 찍으며, 신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해가 조금씩 떠오르자 광장은 점점 붐비기 시작했다. 돗자리를 펴고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하나둘 등장했고, 단체 관람을 온 그룹들도 점점 늘어났다. 기차 시간이 촉박해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숙소로 향해야 했다. 가는 길에 세비야에서 꼭 들러야 할 추로스 가게에도 들러야 했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Bar El Comercio가 바로 그곳이었다. 1904년부터 이어져 온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으로,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 유명한 가게라고 한다. 바르셀로나에서 먹었던 추로스와 달리, 이곳의 추로스는 더 통통하고 설탕이 없는 담백한 맛이었다. 걸쭉한 초콜라테에 찍어 먹는 것은 같았지만,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하루 더 머물렀더라면 분명 한번 더 찾아 왔을 것이다. 우리가 추로스와 함께 엄마의 커피를 함께 주문하자, 나이가 지긋한 남자 직원이 “Mamá primero(엄마 먼저)”라고 외치며 엄마의 커피를 먼저 챙겨주었다. 아침부터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유쾌한 응대로 우리를 웃게 해 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 체크아웃을 하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호텔 측에 택시를 불러줄 수 있는지 물으니 가능하다고 해서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기차 시간이 촉박해 택시가 오기까지 조마조마했지만, 좁고 미로 같은 길도 능숙하게 빠져나가는 택시기사님 덕분에 무사히 마드리드행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 여행의 마지막 도시, 마드리드.
그곳에서는 또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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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