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론다를 떠올리며
그동안 머물렀던 숙소는 방 안에 화장실과 욕실이 딸려 있었지만, 론다의 숙소에서는 각 층에 하나뿐인 공용화장실과 공용샤워실을 이용해야 해서 조금 불편했다. 간단히 손빨래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여행동안 밀린 빨래들도 상당해서 동생과 나는 빨래방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셀프 빨래방이 있었다. 내일 세비아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 터미널도 그 근처라 길도 미리 익혀둘 겸, 저녁에 먹을 음식도 사 올 겸 걸어가 보기로 했다.
봇짐처럼 빨랫감을 싸들고 구글맵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빨래방에 들어서니 먼저 와서 세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할머니 한 분과 중년의 아저씨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두 분 다 가벼운 옷차림에 편안한 모습이 아마도 동네 주민인 듯 보였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비어있는 세탁기에 빨래를 집어넣었다. 빨래방 내부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온통 스페인어뿐인 기계를 마주하니 낯설었고 처음이라 서툴렀다. 결제하는 곳 앞에서 머뭇거리며 이것저것 눌러보고 있으니 의자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와 아저씨 모두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일어나셨다. 한발 빨랐던 할머니의 걸음에 아저씨는 다시 자리에 앉으셨고, 말은 통하지 않지만 손짓, 발짓으로 할머니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 주셨다.
할머니의 도움 덕분에 세탁기를 무사히 작동시키고 의자에 앉아 빨래가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할머니의 모습을 그제야 찬찬히 살펴보니,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보아오던 할머니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작은 체구에 짧은 파마머리, 잔꽃무늬의 옷에 발 편한 운동화, 그리고 양 어깨뒤로 둘러맨 작은 백팩까지 어디서나 만날 수 있을법한 친근한 모습이었다. 할머니는 세탁이 끝난 빨래를 건조기로 옮기셨고 건조를 마친 뒤에는 중앙에 있는 큰 테이블 위에서 곱게 빨래를 개어 바퀴 달린 커다란 가방에 차곡차곡 담으셨다. 그 사이 먼저 오셨던 아저씨는 인사를 남기고 떠났고, 할머니는 새로 빨래방에 입장한 외국인 관광객을 또 도와주셨다. 우리 세탁기가 다 돌아간 후에는 건조기 사용법도 알려주셨다. 어디나 할머니들은 비슷하구나. 부지런하시고, 수시로 움직이시고, 누구든 발 벗고 도움을 베푸시는 할머니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탁을 마치고 빨래방을 나서는 할머니와의 이별이 왠지 모르게 아쉬워 우리는 여러 번 인사를 나눴다. 산뜻한 향이 나는 보송한 빨래를 착착 접어 우리도 숙소로 돌아왔다. 할머니의 친절 덕분에, 그리고 깨끗해진 빨래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의 작은 친절이 그 도시의 인상을 결정지을 수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엄마가 먹고 싶어 했던 초밥을 포장해 가기로 했다. 식당은 외관은 물론 내부도 전혀 초밥집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일본풍의 소품도, 음악도, 내부 장식도 없는 그냥 스페인의 바 같은 곳이었다. 혹시 사장님이 일본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스페인어를 쓰는 스페인 셰프가 초밥을 만들고 있었다. 생소하기도 하고 음식이 맛이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되었다. 사장님은 음식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 편안히 앉아 기다리라며 자리를 안내해 주셨다. 한국, 스페인, 일본의 컬래버레이션인가. 신기하고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자인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겠지만 스페인에서 초밥집을 운영하는 저들에게는 그저 일상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여행도 일상도 하나의 동전에 공존하는 양면 같은 게 아닐까. 나의 여행이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고, 나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포장해 간 음식을 엄마는 맛있게 드셨다. 우리는 간단히 맛만 보고 엄마에게 초밥을 양보했다.
사실 나와 동생은 따로 계획이 있었다. 타파스 식당에 가보기로 한 것이다. 타파스는 술과 함께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한입거리 음식을 말하는데 스페인의 유명한 음식 문화 중 하나이다. 밤이 되면 골목 사이사이마다 온통 타파스를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한데, 그동안은 제대로 즐길 기회가 없었다. 스페인 음식보다 밥을 더 드시고 싶어 하셨던 엄마에게는 저녁식사로 초밥으로 챙겨드리고 우리는 따로 나가보기로 했다. 숙소 주변으로도 타파스 전문 식당들이 많았고 어디나 사람들로 붐볐다. 주변을 한 바퀴 돌며 분위기를 살피다가 야외 테라스에 딱 한 자리가 남은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Las Maravillas’라는 곳이었는데 밝고 쾌활하신 직원분이 메뉴판을 건네주셨다. 신기하게 한국어 메뉴판도 있었다.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곳이었나 보다. 화이트 와인과 양송이 카르파치오, 그리고 추천해 주신 참치 타다키를 주문했다. 늦은 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로 테이블마다 활기가 넘쳤다. 직원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술과 음식과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밤의 가운데에 우리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관광지에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내가 사는 동네에 와서 경치를 즐기고, 음식을 먹고, 돈을 쓴다면? 일자리가 늘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는 것이 좋기도 하겠지만, 항상 소란스럽고 잠깐 왔다가 떠나는 외지인들로 가득한 동네가 마냥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우리에게는 여행지이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니 말이다.
우리가 스페인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바르셀로나에서 오버투어리즘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글을 보았다. 처음에는 관광객이 많이 오면 좋은 것이 아닐까 의아했지만, 심각하게 오르는 월세와 임대료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니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극단적인 반감이나 혐오보다는, 관광객과 거주민 모두에게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평화롭게 해결되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즐거움과 휴식이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과 비극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낮에 빨래방에서 만났던 할머니의 친절이 떠오른다. 숨이 멎을 듯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누에보 다리의 풍경과 밤거리 식당의 타파스, 와인, 부드러운 조명과 활기찬 분위기도. 이 모든 것들 덕분에 나는 론다를 떠올릴 때마다 행복한 마음이 들 것이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에게도, 그곳에 남아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도 언제까지나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도시가 되기를,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러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