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들은 전화통화에 있어서 만큼은 무심하기 그지없다. 가족끼리 이렇게 전화를 안 할 수도 있을까? 아빠와는 일 년에 서너 번이나 겨우 하는 정도이고 엄마와는 그래도 자주 하는 편이지만 그것도 주로 내가 먼저 전화를 거는 편이다. 다른 집은 자녀들이 전화를 안해 부모님들이 서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집은 반대다. 어릴 때부터 아빠에게 '전화는 용건이 있을 때만', '통화는 간단히' 같은 전화비 절약을 위한 가르침을 받고 자라서인지 우리 가족들은 전화로 수다를 떠는 것에 매우 인색하다.
친정과 멀리 떨어져 사는 나는 가족들을 볼 기회가 많지 않으니 부모님은 별일 없이 잘 지내시는지, 집안에 새로운 소식은 없는지, 때로는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귀가 안 좋으신 엄마는 내 말은 잘 못 듣고 엄마말만 하다가 전화를 끊어 버리기 일쑤다. 통화시간이 5분을 넘어간 적이 없으니 이건 뭐 진짜 '용건만 간단히'인 셈이다.
한 번은 항상 나만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아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유치하지만 일부러 엄마가 먼저 전화할 때까지 기다려봤다. 엄마는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서 자존심을 세우며 몇 번 전화하고 싶은 걸 참고 또 참다가 결국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한 달이 지나도 엄마는 나에게 전화 한 통이 없는 게 아닌가. 전화해서 엄마에게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렸다.
"엄마는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가? 딸 소식이 궁금하지도 않아? 어쩌면 그렇게 전화를 한 통도 안 할 수가 있어? 엄마가 먼저 전화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하네!"
그러자 엄마는 이런 내가 웃기는지 크게 웃으며 그랬냐고 미안하다고, 전화해야지 생각하다가도 뭐 하다 보면 잊어버리고 또 그러다 시간이 늦어져서 못하곤 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웃는 엄마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아쉬운 내가 더 자주 전화할 수밖에...
우리 집안의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신혼 초에 시부모님께 전화하는 일은 나에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시댁에서는 집안에 새로 들어온 내가 밝고 싹싹한 며느리 역할을 해주기를 은근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내향인중에 내향인인 데다가 빈말도 못하는 무뚝뚝 그 자체였다. 시부모님께 전화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 고민스러웠다. 하루는 날씨 이야기, 하루는 식사 이야기, 하루는 건강 이야기로 돌려 막기하며 꾸역꾸역 전화를 하다가 점점 횟수가 뜸해졌고 결국에는 각자의 집에 각자가 전화를 하는 것으로 남편과 합의를 보기에 이르렀다. 전화 한 통이 뭐 그리 힘든 일이라고 그랬는지 이제와 생각해 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지금은 어머님과 같이 살아서 안부 전화는 따로 안 해도 되니 그것은 좋다.
그런데 이런 무심함(특히 전화통화에 대한)도 유전인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생겼다. 얼마 전 수학여행을 다녀온 아들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은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서 1박 2일로 수련회나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엄마아빠 없이 친구들하고만 1박을 하는 수학여행을 가게 된 것이었다. 우리 때는 수련관 같은 곳에서 사오십 명 되는 같은 반 아이들이 한방에서 자곤 했는데 요즘에는 숙소도 호텔 수준으로 좋은 곳인 데다가 한방에 서너 명이서 잔다고 했다. 6학년이면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부모 없이 떠나는 1박 2일 여행이니 내 입장에서는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되었다. 도착하면 잘 도착했다고 아니면 숙소에서 자기 전에라도 꼭 엄마에게 연락 주라고 말까지 했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도록 전화는 고사하고 문자 한 통이 없었다. 아쉬운 건 또 나인 건가. 결국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수학여행은 재미있어? 엄마한테 연락도 없고... 흥!' 그런데도 답이 없다.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연락이 없다. 저녁에 돌아온 아들에게 엄마 문자는 봤는지, 왜 엄마에게 연락도 안 했는지 물으니 자기 전에 하려다가 그냥 잠들어버렸다며 미안하단다.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나도 뭐라고 할 말도 없고... 다음부터는 엄마에게 꼭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라고 말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무래도 우리 집 유전자는 전화하고는 안 친한가 보다. 이런 건 안 닮아도 되는데.
말 나온 김에 나도 엄마에게 안부전화나 해야겠다. 주변 사람들 두루두루 살피시고 운동 다니시느라 바쁜 최반장님 대신에 내가 먼저 전화해야지. 먼저 전화하는 사람이 상대방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자주 생각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더 많이 사랑하고 생각하는 거라고 우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