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웃을 수 있다면, 난 오늘도 준비한다

2025년 5월14일 그리고 15일 위원장 일지 - 무대 뒤의 바쁜 이틀

by 기록하는노동자

※매주 토요일 발행되는 '버티는 중입니다 위원장의 비밀일기' 최근 사건에 대한 일기입니다.


5월 14일과 15일, 즐거웠고, 행복했으며, 아팠고, 씁쓸했다.


5월 14일 오전

점심에는 화학연맹 서울지역본부 식사와 화학연맹이 주최하는 지역순회간담회가 있었다.
그래서 오전부터 부지런히 다음 주부터 있을 이동사무실 준비를 했다.

조합원을 만나 전해야 할 이야기, 최근 노동 이슈를 찾아보고,
회사에 5월 사용할 근로시간면제자 활동 공문도 챙기다 보니 시간이 빠듯했다.

노동조합에는 매뉴얼이 없다.
회사마다, 조합마다 상황이 달라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근로시간면제자가 어떻게 활동해야 하는지, 그걸 차곡차곡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훗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기록을 미약하게나마 내가 남기고 있음이 즐겁다.


누군가가 웃는 모습을 본다는 건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아마도 대학교 총학생회 시절, 축제 무대 뒤편에서
객석에 앉아 웃고 즐기던 학우들을 보면서
“나는 무대 뒤에 있는 게 더 맞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주인공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고
즐거워할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무대를 더 반짝이게 만들겠다.

지금 이동사무실을 준비하면서도 그 마음은 같다.

공장에 가서 만날 동지들이 조금이라도 즐겁고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도록
내가 더 준비해야 한다.


5월 15일 오전

전날 아침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
운동을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다른 날처럼 가볍지 않고 걸음걸음이 무겁다.

오후 4시 50분.

부당해고 인정을 취소해달라며 회사가 제기한 행정소송의 4차 변론에 출석해야 하는 날이다.
아침부터 마음이 저릿하다.

이번 변론은 원래 회사가 증인신문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열린 건데,

지난주 금요일, 갑자기 증인 신청을 철회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우리 회사는 내가 2010년부터 지금까지 13년 넘게 사랑해온 회사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는 자는 회사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난 한 문학가의 말을 슬쩍 바꿔서 말하고 다녔다.

나는 문제를 보고 슬퍼했고, 노여워했고, 그래서 바꾸고자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 나에게 회사가 준 것은 해고 통지서 한 장이었다.

오늘도 행정법원에 가야 한다.
마음은 무겁고, 판례나 뒤적이고 있는 내 모습이 안타깝고 한심하게 느껴진다.


5월 14일 오후

서울지역본부 간담회는 오후 2시.
그전에 서울지역 위원장님들과 점심을 약속했다.

늘 응원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다른 노동조합 위원장님들을 만나면 진심으로 큰 힘이 된다.

서로 정보를 나누고 환담을 하며 즐거운 식사 자리를 가졌다.

간담회 현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표창을 받았다.

“노동운동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투철한 사명감으로 조합원의 권익 신장과
화학노련 발전에 헌신적인 노력을 다하여 타의 모범이 됨”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지금껏 걸어온 길이 그랬나 보다.

동지들이 있었기에, 간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런데 나만 상을 받은 것 같아 송구하면서도 기쁘지 않을 수 없다.

5월 노동조합 소식지에 꼭 실어야겠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하루 종일 밀려왔다.

KakaoTalk_20250517_235544735_01.jpg 쑥쓰럽지만 받아서 기분좋은 표창패


5월 15일 오후

재판이 끝나면 저녁이나 하자며 법무법인 오월의 강호민 변호사님이 연락을 주셨다.

서울행정법원까지 버스 타고 지하철 갈아타며 1시간 30분을 걸려 도착했는데 몸이 땀범벅이다.

날씨는 덥지 않은데, 왜 이리 땀이 나는 건지.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법원 로비에서 변호사님들과 안부를 나누고, 잠시 후 재판정에 들어갔다.
이미 앞 재판이 밀려 있었고, 우리 사건은 5시 10분쯤 시작됐다.

재판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고, 6월 26일 오후 2시 선고기일이 잡혔다.


재판을 마치고 식사를 하며 변호사님이 말씀하셨다.

“회사는 소송에서 몇 번을 져도 큰 타격이 없어요.
하지만 위원장님은, 노동조합은 한 번만 지면 너무 크잖아요.
노동사건은 그래서 더 힘든 겁니다.”

맞는 말이다.
회사는 그냥 한 부서에서 진행하는 일일 뿐이고,
그걸 지시한 사람도 크게 책임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조합은 목숨 걸고 싸우는 중이다.

현실은 늘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입사 이후, 뭔가 바꾸려 하고,

현장을 고민하던 열정적인 임원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이젠 공장 경험도 없는 관리업무 출신과 외부영입 임원이
회사의 전략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을 바라보며 슬픔과 씁쓸함이 쓰게 밀려온다.


그런 나에게 변호사님이 웃으며 말했다.
“다 끝났으니까, 이제 맛있는 거 먹읍시다.”

그 말에 웃고, 노동조합 이야기, 삶 이야기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어느새 슬픔과 씁쓸함은 사라지고 행복감이 가득하다.


회사와 다툼이 있어 슬픔과 씁쓸함이 몰려와도,
좋은 동지들이 함께 있어 행복해지는 하루하루다.

그리고 나는,

그런 동지들을 위해 언제든 무대 뒤에 설 준비가 되어 있다.


KakaoTalk_20250517_235544735_02.jpg 서울행정법원 앞에서...


이 기록은 단지 나의 하루가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의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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