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안은 따뜻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늦겨울 바람이 불어오고,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태리는 커피잔을 꼭 쥔 채 마주 앉은 재욱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재욱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눈빛이었다.
“태리야, 우리... 그만하자.”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귀를 의심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장면은 느리게 지나갔지만, 말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뭐...?”
재욱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커피잔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더는... 마음이 가지 않아.”
말이 끝나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카페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옆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하지만 태리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재욱의 말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음이... 가지 않는다고?”
태리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차갑게 느껴진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떨리는 손을 감쌌다.
“언제부터?”
“정확히는 모르겠어. 근데, 너랑 있어도 설레지 않고... 그냥, 의무감처럼 느껴졌어.”
재욱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리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낯설었다. 저렇게 차가운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와 만나기 위해 아침부터 설레며 옷을 고르고, 오랜만에 힐까지 신었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예뻐 보이고 싶어서 립스틱 색까지 신경 썼는데, 정작 그는 한 번도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 게 있어?”
재욱은 고개를 저었다.
"네 잘못은 없어. 그냥… 내 마음이 더 이상 너에게 가지 않을 뿐이야. 괜히 시간을 끌면 네가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질까 봐, 지금이라도 말하는 거야."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는 무감각했다. 태리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래서, 지금 헤어지자고?”
“응. 미안해.”
재욱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태리는 그의 손목이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잘 지내.”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재욱은 미련 없이 돌아섰고, 태리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느새 커피는 식어 차가워졌고, 카페 안의 소음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태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치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억울하고 분했다. 이유도 없이 차인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했다.
힐이 불편했지만,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내달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한강까지 내리 걸었다.
발이 아팠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재욱과 함께 걸었던 길, 함께 웃고 떠들던 공원, 손잡고 거닐던 한강 다리 위... 모든 게 그와의 추억으로 가득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발이 상하고 피가 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다.
한강 다리 위에 멈춰섰다.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눈앞에 탁 트인 한강이 펼쳐져 있었다. 불빛이 반짝이고, 물결이 찰랑거렸다. 태리는 난간에 기대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제 어떡하지...’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의미가 없었다. 그가 없는 세상은 텅 빈 껍데기 같았다. 눈을 감았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그때, 핑크색 빛이 눈을 스쳤다. 태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리 끝에 작은 카페가 있었다. 한강 다리 위에 카페가 있었던가?
기억 속에 없었다. 분명히 없었는데...
그 카페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불빛이 반짝거리며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커다란 핑크색 간판에는 ‘들어오세요’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자리에 들어서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낯선 곳인데도 어딘가 익숙한 듯한 기분이었다. 이끌리듯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고요하고 따뜻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낡은 시계, 고풍스러운 소파, 묘한 문양이 새겨진 보석함... 그리고 그중에서도 태리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아우라 물컵’이라고 적힌 작은 플라스틱 컵. 오로라 빛처럼 아름다운 색이 컵 표면에 아른거렸다. 형형색색의 빛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태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컵을 집어 들었다. 순간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이상했다. 플라스틱 컵인데도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손님, 그 컵을 고르셨군요.”
고개를 돌리자 중년의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태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컵... 얼마인가요?”
“가격은 없어요. 다만... 손님에게 필요한 물건이기에 드리는 겁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태리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여자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태리는 이유도 모른 채 그 컵을 손에 쥐고 카페를 나섰다. 뒤돌아보니 카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핑크색 간판도, 문도, 불빛도 없었다.
한강 다리 위에는 찬 바람만이 불어왔다.
태리는 손에 쥔 ‘아우라 물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형색색의 빛이 오묘하게 일렁였다. 그것은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며칠째 재욱에게 연락할 수 없었다. 차마 먼저 전화할 용기도 없고, 문자를 보내려다 지웠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숨이 막혔다.
전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머릿속에 온통 재욱이 떠올랐다. 함께 웃던 순간들, 다정했던 목소리, 손끝의 온기까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그날 밤, 태리는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서 돌아왔다. 그리고 거실에 놓인 ‘아우라 물컵’을 집어 들었다. 신비로운 빛깔이 일렁이는 컵이었다.
“이걸 다 마시면 좀 나아질까...”
태리는 그 컵에 소주를 가득 따랐다.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연재의 이름이 떴다.
태리는 잠시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봤다. 재욱과 셋이 항상 같이 어울렸던 연재였다. 혹시 무슨 소식을 들었을까?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태리야, 너... 재욱이랑 헤어졌다며?”
태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누가 그래?”
“누가 그러긴. 재욱이가 나한테 말했지. 너한테 미안한 마음 크다고 하더라. 괜찮아? 너무 힘들면 나한테 말해.”
연재의 따뜻한 목소리에 태리는 눈물이 차올랐다.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그냥... 괜찮지 않아.”
“술 한잔할래? 얼굴 보자. 우리 동네 술집에서 보자.”
“그래... 그럴게.”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더 무거웠다. 아까 따랐던 소주는 그대로였다.
태리는 한숨을 쉬며 컵을 내려놓았다. 컵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 일렁였다.
그 순간,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다.
‘아우라 물컵을 사용하셨습니다. 기회는 단 한 번. 당신의 사랑을 찾아보세요.’
태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스팸 문자가 요즘 별걸 다 보내네.”
문자를 바로 삭제하고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연재와 만나기로 한 술집에 도착했지만, 연재는 오지 않았다.
태리는 한참을 기다렸다. 열 번 넘게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이 없었다.
문자가 도착한 지도 오래됐는데 답장이 없었다.
태리는 짜증이 났다.
‘뭐야... 왜 연락도 없이 잠수야...’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연재의 번호가 ‘없는 번호’로 떴다.
“뭐야? 고장 난 건가?”
태리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술집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누군가와 세게 부딪혔다.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밀렸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마자 눈이 커졌다.
“이재욱...”
재욱이 눈앞에 서 있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눈빛... 하지만 어딘가 낯설었다.
태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다.
재욱은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한눈을 팔았나 봐요. 많이 아프세요?”
태리는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말투가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제 모르는 사람 취급하는 거야? 이렇게까지 모른 척해야 했어?’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날 이후, 태리는 계속해서 재욱과 마주쳤다.
그는 매번 처음 보는 사람처럼 웃으며 다가왔다.
“우리 또 보네요. 이 정도면 운명 아니에요?”
태리는 처음엔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하리만큼 익숙해졌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사랑.
재욱은 여전히 다정했고, 태리는 또다시 그의 곁에서 행복했다.
그러나 연재는 재욱이 헤어지자고 말하며 했던 대화 내용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자신에게 더 이상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그 말...
그 말이 어느새 연재의 마음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재욱을 다시 만나고, 처음엔 마치 운명처럼 행복했다. 재욱의 다정한 미소, 익숙한 목소리, 다시 함께하는 순간들이 모든 불안과 상처를 지워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욱을 볼 때마다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게 됐다. 그의 말투 하나, 눈빛 하나에 전전긍긍했다. 혹시라도 재욱이 질려버릴까 봐, 또다시 떠나버릴까 봐 스스로를 숨기고 맞춰가며 연애를 이어갔다.
집에 돌아오면 행복보다는 지침이 몰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을 본 연재는 깜짝 놀랐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흐릿했다. 원래의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느새 연재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재욱에게 맞춰 사는 삶을 살고 있었다. 더 이상 빛나던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재욱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비한 아우라 물컵을 다시 들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설명서는 없었다. 연재는 자신이 했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때의 자신은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며 사랑받고 있었다.
물컵 안에 물을 담았다. 그리고 조용히 쏟아부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재욱이었다.
다시 만난 재욱일까, 아니면 진짜 재욱일까...
하지만 이제 연재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전화를 받은 연재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했다.
"재욱아. 나 많이 생각해봤어. 내가 널 사랑하는 건 분명한데... 널 만나면서 내 모습을 잃어가고 있더라고.
나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는, 남도 사랑하고, 자신도 사랑하는 그런 사람과 사랑하고 싶어졌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침묵 속에서 연재는 미소 지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는 순간, 유리창에 비친 희미했던 모습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