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교통사고 이후, 재현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고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 그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죽은 영혼들이 그의 세상에 끼어들며, 그에게는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없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죽은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그러나 선명하게 그의 앞에 나타났다. 재현은 처음으로 귀신을 보았을 때, 그들이 사람인지 영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가끔은 그들이 말도 걸어오고, 눈빛을 맞추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재현은 무작정 땅만 보고 다녔다.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는 길을 걸을 때면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옮기기 바빴다.
그의 할머니는 그가 이 능력을 가지게 된 뒤, 재현에게 가장 중요한 경고를 해주었다. "귀신을 봐도 무시하고 지나가거라.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마라. 그들이 너를 찾게 되면, 네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수도 있다." 할머니의 말은 그에게 깊은 경고로 다가왔다. 죽은 영혼들의 요구는 끝이 없을 것이고, 그것을 계속 들어주는 일은 자신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뜻이었다. 처음에 재현은 할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은 그가 살아가야 할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가 어떻게 죽은 영혼들을 무시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해 할머니는 그만의 규칙을 만들어 주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영혼을 구별하는 법이었다.
사람은 아무리 눈이 마주쳐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간다. 반면, 죽은 영혼은 눈길을 마주치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따라오며, 요구를 한다. 이 간단한 규칙은 재현이 죽은 영혼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기준이 되었다. 몇 십 년이 지나면서, 그는 그 규칙을 몸에 익혔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보는 일은 여전히 놀라운 일이었고, 그때마다 재현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공포를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재현은 성해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성해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주말에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나누고 어젯밤에 통화를 했기에, 그 소식은 믿기지 않았다. 사고로 사망했다는 말을 들은 재현은 그저 멍해졌다.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일을 끝낸 뒤, 성해가 있는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선 재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성해의 얼굴이 담긴 모니터를 보고서야,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 옆에는 성해와 같은 날 죽음을 맞이한 네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죽은 영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보다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능력이 그만큼 끔찍하게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성해의 빈소는 그야말로 슬픔과 비통함이 가득 차 있었다. 재현은 성해의 동창들보다 먼저 도착한 것처럼 보였고, 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성해의 아버지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술을 마시던 성해 아버지는 재현을 발견하고 서둘러 반겼다. 하지만 그때, 재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활짝 웃고 있는 성해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 성해는 여전히 활기차고 웃고 있었다. 그 옆에서 슬픔을 참아내고 있는 성해의 부모님을 보며, 재현은 씁쓸한 마음을 느꼈다. 그들은 성해를 볼 수 없지만, 재현은 성해를 볼 수 있다는 현실에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장례식장에서 재현을 만난 성해는 죽음을 맞이한 그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반갑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해는 끝없이 재현에게 떠들어댔고, 재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성해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에게 친숙하고 편안했다. 하지만 그런 성해와 말을 나누면서도 재현은 마음 한구석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영혼을 보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성해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아무리 성해가 친한 친구라고 해도 그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해는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재현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자신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그저 그가 계속 옆에 있어야만 한다는 현실이 더 괴로웠다.
발인 날, 성해는 재현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현은 성해의 일방적인 추억 여행을 듣고 있어야 했다. 성해는 그와 함께 있었던 모든 순간을 떠올리며 계속 얘기했고, 재현은 이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성해는 재현의 일상을 완전히 침범했고, 그로 인해 재현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고립감을 느꼈고, 마음속에서 성해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어느 날, 재현은 중요한 미팅에서 발표를 맡게 되었다. 평소 같으면 자가용을 이용해 편하게 이동했겠지만, 이번에는 자료를 더 보려면 지하철을 타야 했다. 오랜만에 지하철에 탄 재현은 성해가 옆에 없다는 사실에 편안함을 느꼈다. 출근길이라 그런지 지하철 안은 고요하고, 사람들이 대부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재현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성해가 어디에선가 나타날까 봐 긴장했다. 그때,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재현은 책을 들고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책 속에서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이미 낯선 인물이 서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영혼일까?
"너, 내가 보이는구나."
재현은 그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책을 거꾸로 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