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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일기

by 서리가내린밤 Feb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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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마지막 인간, 소희는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정적이 가득한 공간, 그녀의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창밖으로 붉게 물든 하늘이 보였다. 석양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이제 더는 누구와도 이 풍경을 나눌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희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어제, 거대한 우주선이 하늘을 가르며 떠났다. 마지막 생존자들마저 떠나면서 이 땅에는 더 이상 인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있다니.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되었다. 마른침을 삼킨 소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선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키우던 셰퍼드, 챌리였다.


“챌리….”


반가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챌리는 꼬리를 흔들며 소희를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떠났지만, 이 충직한 개는 끝까지 그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소희는 챌리를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제 이 세상에 그녀와 챌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몇십 년 전부터 과학자들은 경고했다. 기후 변화가 한계점을 넘었다고.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지구는 점점 뜨거워졌고, 자연재해는 거세졌으며, 식량과 자원은 점차 고갈되었다.


결국 인류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야 했다. 마침내 과학자들은 지구와 유사한 행성을 발견했고, 이주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문제는 그곳까지 가는 데 100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냉동 수면 캡슐에 들어가, 오랜 항해 끝에 깨어나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다.


출발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도시는 점점 텅 비어갔다. 소희의 친구들도 하나둘 떠났다.


“같이 가자, 소희야. 여기 남아 있으면 죽어.”


“난… 못 가.”


그녀는 단호했다.


이곳을 떠나는 것이 옳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지구에서 나고 자랐고, 부모님의 흔적도 이곳에 남아 있었다. 이제껏 살아온 삶을 한순간에 포기하고 떠난다는 것이 그녀에겐 죽음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정부에서도 그녀를 강제로 태우진 않았다. 출발 직전까지 몇 차례 연락이 왔지만, 끝내 소희는 배웅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어제, 마지막 우주선이 떠났다.


하늘에 길게 그어진 비행운을 바라보며 소희는 그제야 후회했다.


‘나도 그냥 떠날 걸 그랬나….’


이제 그녀는 지구에 혼자 남았다. 아니, 챌리와 함께였다.


처음에는 자유로웠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한남동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 살고,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골라 집을 꾸몄다.


거실에는 푹신한 소파와 카펫을 깔고, 서재는 책으로 가득 채웠다. 침실에는 하얀 이불을 깔고, 드레스룸에는 세상의 모든 옷을 정리해 넣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처음엔 모든 것이 신선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 모든 것들이 점점 의미를 잃어갔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라진 거리, 텅 빈 마트와 카페, 신호가 꺼진 전광판과 정전된 도시.


이제 더 이상 TV도 볼 수 없고,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전기가 끊기면서 냉장고 속 음식들은 상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너무 외로웠다.


챌리는 그녀 곁을 지켰지만,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곁을 맴돌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신이 쓴 일기를 발견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긴 할까.

다른 행성에서 사는 외계인이 발견해서는 내가 쓴 이 글을 연구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가죽은 다 벗겨지고 뼈만 남은 채 이 일기만 남겨있지는 않을까.


상상할수록 머릿속에 생생한 장면이 그려졌다.

황폐한 지구 위, 그녀의 시신은 뼈만 남고, 그녀가 쓴 일기장만이 바람에 흩날리며 먼 미래의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모습.


소희는 홀로 죽음을 맞이할 날을 두려워하며, 그 생각 속에서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희는 마지막 일기를 썼다.


‘오늘이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챌리가 그녀의 곁에 누워있었다.


지구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붉은 석양이 저물고,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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